1. 개요
리비아는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 지중해에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 이집트, 남동쪽으로 수단, 남쪽으로 차드와 니제르, 서쪽으로 알제리, 북서쪽으로 튀니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수도는 트리폴리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지중해 연안은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고대부터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 등 여러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며, 7세기 이후 이슬람화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오랜 지배를 거쳐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51년 유엔의 중재로 독립하여 리비아 왕국을 수립했다. 1969년 무아마르 카다피의 쿠데타 이후 독특한 사회주의 체제인 자마히리야를 구축하였으나, 42년간의 장기 집권은 2011년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발발한 내전으로 막을 내렸다.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두 차례의 내전을 겪으며 국가가 사실상 분열되었고, 현재는 유엔의 지원을 받는 통합정부(GNU)와 동부 토브룩에 기반을 둔 대표자회의(HoR) 간의 정치적 대립이 지속되고 있으며, 치안 불안과 경제 재건, 민주주의 정착 등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리비아는 막대한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2023년 데르나 지역에서 발생한 대홍수는 국가적 재난으로 기록되었으며, 재건 노력이 진행 중이다.
2. 국명
리비아의 공식 국명은 리비아국(دولة ليبيا다울라트 리비야아랍어, State of Libya영어)이며, 통칭 리비아(ليبيا리비야아랍어, Libya영어)로 불린다.
'리비아'라는 이름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나일강 서쪽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인들을 지칭하던 '르부'(rbw르부이집트어 (고대))에서 비롯되었다. 이 명칭은 고대 그리스로 넘어가 '리비에'(Λιβύη)가 되었으며, 초기에는 이집트 서쪽의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때로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지칭하기도 했다.
현대적인 의미의 '리비아'라는 국명은 1903년 이탈리아의 지리학자 페데리코 미누틸리(Federico Minutilli)에 의해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1551년부터 1911년까지 오스만 제국이 '트리폴리타니아 에얄레트'로 통치하던 현재 리비아 해안 지역을 지칭하던 용어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리비아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국명이 변경되었다.
- 1951년 ~ 1963년: 리비아 연합 왕국 (المملكة الليبية المتحدة알맘라카 알리비야 알무타히다아랍어)
- 1963년 ~ 1969년: 리비아 왕국 (المملكة الليبية알맘라카 알리비야아랍어)
- 1969년 ~ 1977년: 리비아 아랍 공화국 (الجمهورية العربية الليبية알줌후리야 알라비야 알리비야아랍어)
- 1977년 ~ 1986년: 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الجماهيرية العربية الليبية الشعبية الاشتراكية알자마히리야 알라비야 알리비야 아시샤비야 알이슈티라키야아랍어)
- 1986년 ~ 2011년: 대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الجماهيرية العربية الليبية الشعبية الاشتراكية العظمى알자마히리야 알라비야 알리비야 아시샤비야 알이슈티라키야 알우즈마아랍어)
2011년 내전 당시 결성된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는 국명을 단순히 '리비아'로 변경할 것을 선언했다. 2011년 9월, 유엔은 리비아의 대표권을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에서 '리비아'로 이관하는 결의(66/1)를 채택했다. 국제표준화기구(ISO) 역시 이에 따라 국명을 변경했다.
2013년, 구 국민의회(2012-2014)는 국명을 '리비아국'(State of Libya영어)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2017년 12월 22일, 유엔 주재 리비아 대표부는 공식 국명이 '리비아국'이며, 약칭은 '리비아'임을 유엔에 공식 통보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현재 리비아 지역은 이프리키야라고 불렸으며, 북서부는 수도 트리폴리(아랍어명: 타라불루스)의 이름을 따 트리폴리타니아(타라불루스), 북동부는 바르카(고대부터 사용된 명칭, 키레나이카라고도 불림), 남부 내륙은 페잔 등의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16세기에 이 지역을 병합한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 전체를 서타라불루스 주(州)로 통치했으나, 1911년 이탈리아 왕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이 지역을 빼앗으면서 고대 명칭을 부활시켜 '리비아'라고 칭했다.
3. 역사
리비아 지역은 고대 문명의 교차로였으며,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 반달,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7세기 이슬람 정복 이후 아랍화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거쳐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하여 왕정을 수립했으나, 1969년 무아마르 카다피의 쿠데타로 공화국이 되었고, 독특한 자마히리야 체제를 구축했다. 2011년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내전이 발발하여 카다피 정권이 붕괴된 후,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두 차례의 내전을 겪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3.1. 고대와 중세

리비아의 해안 평야 지대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거주했다. 베르베르인의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조상들은 청동기 시대 후기에 이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부족 중 가장 초기에 알려진 이름은 게르마를 중심으로 한 가라만테스족이다. 페니키아인들은 리비아에 교역소를 설치한 최초의 민족이다. 기원전 5세기까지 페니키아의 가장 큰 식민지였던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으로 패권을 확장했고, 이곳에서 푸닉 문명으로 알려진 독특한 문명이 탄생했다.
기원전 630년, 고대 그리스인들은 리비아 동부의 바르카 주변 지역을 식민지화하고 키레네 시를 건설했다. 200년 안에 키레나이카로 알려지게 된 이 지역에는 4개의 중요한 그리스 도시가 추가로 건설되었다. 이 지역은 유명한 키레네 학파 철학의 본고장이었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 제국의 캄비세스 2세 군대가 키레나이카를 점령했고, 이후 2세기 동안 페르시아 또는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다.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31년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키레나이카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리비아 동부는 다시 그리스인의 통제하에 놓였으며, 이번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카르타고가 멸망한 후 로마인들은 즉시 트리폴리타니아(트리폴리 주변 지역)를 점령하지 않고, 대신 누미디아 왕들의 통제하에 두었다가 연안 도시들이 보호를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마지막 그리스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은 키레나이카를 로마에 유증했고, 로마는 기원전 74년에 공식적으로 이 지역을 병합하여 크레타와 함께 로마의 속주인 크레타 에트 키레나이카를 만들었다. 아프리카 노바 속주의 일부로서 트리폴리타니아는 번영했으며, 2세기와 3세기에 세베루스 왕조의 본거지였던 렙티스 마그나 시가 절정기를 맞이하며 황금기를 누렸다.
동부에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키레나이카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이 지역은 키토스 전쟁 동안 심하게 파괴되었고 그리스인과 유대인이 거의 사라졌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군사 식민지로 다시 인구를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리비아는 일찍이 니케아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교황 빅토르 1세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러나 리비아는 아리우스주의나 도나투스파와 같은 초기 기독교의 비니케아적 분파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암르 이븐 알 아스의 지휘 하에 라시둔 칼리파국의 군대가 키레나이카를 정복했다. 647년, 압둘라 이븐 사드가 이끄는 군대가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트리폴리를 최종적으로 점령했다. 페잔은 663년 우크바 이븐 나피에 의해 정복되었다. 내륙의 베르베르 부족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아랍의 정치적 지배에는 저항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리비아는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관할 하에 있었으나, 750년 아바스 칼리파국이 우마이야 왕조를 타도하면서 바그다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800년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가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를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임명하자, 리비아는 아글라브 왕조 하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10세기경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리비아 서부를 장악했고, 972년에는 전 지역을 통치하며 볼로긴 이븐 지리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븐 지리의 베르베르계 지리드 왕조는 결국 시아파 파티마 왕조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바그다드의 수니파 아바스 왕조를 정통 칼리프로 인정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파티마 왕조는 주로 바누 술라임과 바누 힐랄이라는 두 아랍 카이시 부족 수천 명을 북아프리카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 사건은 리비아 농촌 지역의 구조를 급격하게 변화시켰고, 이 지역의 문화적, 언어적 아랍화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트리폴리타니아에서 지리드 왕조의 통치는 단명했고, 이미 1001년에 바누 카즈룬의 베르베르인들이 분리 독립했다. 트리폴리타니아는 1146년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에게 점령될 때까지 그들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후 50년 동안 트리폴리타니아는 아이유브 왕조, 알모하드 칼리파국, 바누 가니야 반란군 간의 수많은 전투 현장이었다. 후에 알모하드 왕조의 장군 무함마드 이븐 아부 하프스가 1207년부터 1221년까지 리비아를 통치했고, 이후 알모하드로부터 독립한 튀니지의 하프스 왕조가 세워졌다. 14세기에는 바누 타비트 왕조가 트리폴리타니아를 통치하다가 다시 하프스 왕조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16세기까지 하프스 왕조는 스페인과 오스만 제국 간의 권력 투쟁에 점점 더 휘말리게 되었다.
아바스 왕조의 통제력이 약화된 후, 키레나이카는 1517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기 전까지 툴룬 왕조, 이흐시드 왕조,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술탄국 등 이집트에 기반을 둔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다. 페잔은 카넴-보르누 제국의 통치 이후 아울라드 무함마드 왕조 하에서 독립을 획득했다. 오스만 제국은 1556년에서 1577년 사이에 최종적으로 페잔을 정복했다.
3.2. 오스만 제국 시기

1510년 합스부르크 스페인이 트리폴리를 성공적으로 침공하고 성 요한 기사단에게 양도한 후, 1551년 오스만 제국의 제독 시난 파샤가 리비아를 장악했다. 그의 후계자인 투르구트 레이스는 트리폴리의 베이로 임명되었고, 1556년에는 트리폴리의 파샤가 되었다. 1565년까지 트리폴리의 행정 권한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의 술탄이 직접 임명한 파샤에게 위임되었다. 1580년대에는 페잔의 통치자들이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키레나이카에는 오스만 제국의 권위가 미치지 못했지만, 다음 세기 후반에 벵가지에 베이가 주둔하여 트리폴리 정부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했다. 유럽인 노예와 수단에서 수송된 다수의 흑인 노예 또한 트리폴리 일상생활의 한 특징이었다. 1551년, 투르구트 레이스는 몰타의 고조 섬 인구 거의 전체인 약 5,000명을 노예로 만들어 리비아로 보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권은 파샤의 예니체리 군단에게 넘어갔다. 1611년 데이들은 파샤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데이 술라이만 사파르가 정부 수반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00년 동안 일련의 데이들이 사실상 트리폴리타니아를 통치했다. 가장 중요한 두 명의 데이는 메흐메드 사키즐리(1631-1649 재위)와 오스만 사키즐리(1649-1722 재위)였으며, 이들은 파샤이기도 했고 효과적으로 지역을 통치했다. 오스만 사키즐리는 키레나이카도 정복했다.

오스만 정부의 지시가 부족했던 트리폴리는 군사적 무정부 상태에 빠졌고, 쿠데타가 연이어 일어나며 1년 이상 재임한 데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한 쿠데타 중 하나는 터키 장교 아흐메드 카라만리가 주도했다. 카라만리 왕조는 1711년부터 1835년까지 주로 트리폴리타니아를 통치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키레나이카와 페잔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흐메드의 후계자들은 그 자신만큼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이 지역의 미묘한 힘의 균형은 카라만리 왕조를 유지시켰다. 1793-95년 트리폴리타니아 내전이 이 시기에 발생했다. 1793년 터키 장교 알리 파샤가 하메트 카라만리를 폐위시키고 잠시 트리폴리타니아를 오스만 제국의 통치로 복귀시켰다. 하메트의 형제 유수프(1795-1832 재위)는 트리폴리타니아의 독립을 재확립했다.
19세기 초, 미국과 트리폴리타니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제1차 바르바리 전쟁과 제2차 바르바리 전쟁으로 알려진 일련의 전투가 벌어졌다. 1819년까지 나폴레옹 전쟁의 여러 조약으로 인해 바르바리 국가들은 해적 행위를 거의 완전히 포기해야 했고, 트리폴리타니아의 경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수프가 약화되자 그의 세 아들을 중심으로 파벌이 생겨났고 곧 내전이 발발했다.
오스만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카라만리 왕조와 독립 트리폴리타니아의 종식을 고했다. 질서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압드 엘-겔릴과 구마 벤 칼리파 휘하의 리비아인 반란은 1858년 구마 벤 칼리파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제2차 오스만 직접 통치 기간에는 행정 개혁이 이루어졌고, 리비아 세 지방의 통치에 더 큰 질서가 잡혔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는 사하라 교역으로부터 수입을 얻기 위해 1850년에서 1875년 사이에 마침내 페잔으로 재확립되었다.
3.3. 이탈리아 식민 통치와 연합군 점령기

1911년~1912년의 이탈리아-투르크 전쟁 이후, 이탈리아는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 세 지역을 동시에 식민지로 만들었다. 1912년부터 1927년까지 리비아 영토는 이탈리아령 북아프리카로 알려졌다. 1927년부터 1934년까지 이 영토는 이탈리아 총독이 다스리는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와 이탈리아령 트리폴리타니아 두 개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약 15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리비아에 정착했으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했다.
오마르 무크타르는 이탈리아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 운동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31년 9월 16일 체포되어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영웅이 되었다. 그의 얼굴은 현재 그의 애국심을 기리고 인정하는 의미에서 리비아 10디나르 지폐에 인쇄되어 있다. 또 다른 저명한 저항 운동 지도자인 이드리스 알-마흐디 앗-사누시(후일 이드리스 1세 국왕) 키레나이카 토후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리비아 저항 운동을 계속 이끌었다.
이탈리아에 의한 소위 "리비아 평정"은 키레나이카 원주민의 대량 학살을 초래하여 키레나이카 인구 225,000명 중 약 4분의 1이 사망했다. 일란 파페는 1928년에서 1932년 사이에 이탈리아군이 "베두인 인구의 절반을 (이탈리아 강제 수용소에서의 질병과 기아를 통하거나 직접적으로) 살해했다"고 추정한다.

1934년 이탈리아는 키레나이카, 트리폴리타니아, 페잔을 통합하고 통합 식민지의 수도를 트리폴리로 하여 "리비아"(고대 그리스인들이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체에 사용했던 명칭)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사회 기반 시설 개선과 공공 사업을 강조했다. 특히 1934년부터 1940년까지 리비아의 철도 및 도로망을 대폭 확장하여 수백 킬로미터의 새로운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고 새로운 산업과 수십 개의 새로운 농업 마을 설립을 장려했다.
1940년 6월,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리비아는 치열한 북아프리카 전역의 전쟁터가 되었고, 결국 1943년 이탈리아와 그 동맹국인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패배로 끝났다.
1943년부터 1951년까지 리비아는 연합국의 점령하에 있었다. 영국군은 이전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두 지방인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를 관리했고, 프랑스는 페잔 지방을 관리했다. 1944년 이드리스는 카이로 망명에서 돌아왔지만, 1947년 일부 외세 통치가 철폐될 때까지 키레나이카에 영구 거주하는 것을 거부했다. 1947년 연합국과의 평화 조약 조건에 따라 이탈리아는 리비아에 대한 모든 영유권을 포기했다.
3.4. 리비아 왕국

국민 회의는 군주제를 수립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키레나이카의 에미르인 사이이드 이드리스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사이이드 이드리스는 그의 조부가 전세기에 아랍 세계의 서구 영향력에 대응하여 창설한 영향력 있는 사누시 종교 형제단의 지도자로서 존경받는 지위를 차지했다. 이 독실한 이슬람 운동은 사막의 베두인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얻었으며 리비아의 주요 정치 세력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 말기에는 리비아 내륙을 효과적으로 통치했다.
1890년 키레나이카의 한 오아시스에서 태어난 사이이드 이드리스는 어린 나이에 사누시 교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통치하의 이집트에서 상당 기간 망명 생활을 했으며, 1943년 추축국이 축출된 후 리비아로 돌아왔다. 1951년 12월 24일, 이드리스 1세 국왕으로서 그는 벵가지에서 라디오를 통해 국민에게 연설했다. 1949년 11월 21일, 유엔 총회는 리비아가 1952년 1월 1일 이전에 독립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드리스는 이후 유엔 협상에서 리비아를 대표했다. 1951년 12월 24일, 리비아는 이드리스 1세 국왕 하의 입헌 세습 군주국인 리비아 연합 왕국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신생 왕국은 어려운 전망에 직면했다. 중요한 산업이나 농업 자원이 부족했다. 왕국의 주요 수출품은 가죽, 양모, 말, 타조 깃털로 구성되었다. 세계에서 1인당 소득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맹률 또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 이미 60대였던 이드리스 1세 국왕에게는 직계 후계자가 없었다. 1932년에 결혼한 그의 사촌은 여러 차례 유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53년에 태어난 그들의 아들은 출생 직후 비극적으로 사망했다. 왕위 계승자로 지정된 왕세자 리다는 이드리스의 동생이었지만, 왕실은 끊임없는 분쟁에 시달렸다. 베두인 인구 사이에서 그의 지지를 공고히 했던 이드리스 국왕의 독실한 이슬람 신앙은 리비아의 현대화 및 도시 지식인 흐름과 충돌했다.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타니아 간의 경쟁을 해결하기 위해 벵가지와 트리폴리는 2년마다 번갈아 가며 수도 역할을 했다.
수많은 관료들이 빠르게 등장하면서 왕실 정부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1959년 상당한 석유 매장량이 발견되고 이후 석유 판매로 인한 수입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가 극도로 부유한 국가를 세울 수 있게 해주었다. 석유는 리비아 정부의 재정을 극적으로 개선했지만, 국부가 이드리스 국왕과 국가 엘리트의 손에 집중되는 것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만은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역에서 나세르주의와 아랍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계속 고조되었다.
3.5. 카다피 정권
1969년 9월 1일, 무아마르 카다피가 이끄는 반란군 장교단이 이드리스 국왕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는 알 파테 혁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카다피는 정부 성명과 리비아 공식 언론에서 "혁명의 형제적 지도자이자 안내자"로 불렸다. 그는 이후 40년 동안 리비아의 역사와 정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1970년 10월 모든 이탈리아 소유 자산이 몰수되었고, 12,000명의 이탈리아인 정착민 공동체는 소규모 이탈리아계 리비아 유대인 공동체와 함께 리비아에서 추방되었다. 그날은 "복수의 날"로 알려진 국경일이 되었으나, 이후 이탈리아-리비아 관계 개선으로 "우정의 날"로 개칭되었다.

리비아의 번영 증가는 내부 정치 탄압 증가와 함께 이루어졌으며, 1973년 법률 75호에 따라 정치적 반대는 불법화되었다. 카다피의 혁명위원회를 통해 인구에 대한 광범위한 감시가 이루어졌다. 카다피는 또한 이전 정권이 여성에게 부과했던 엄격한 사회적 제한을 완화하고자 했으며, 개혁을 장려하기 위해 혁명 여성 조직을 설립했다. 1970년에는 양성평등과 임금 평등을 확인하는 법이 도입되었다. 1971년 카다피는 리비아 여성 총연맹 창설을 후원했다. 1972년에는 16세 미만 소녀의 결혼을 범죄화하고 여성의 동의를 결혼의 필수 전제 조건으로 만드는 법이 통과되었다.
1975년 10월 25일, 주로 미스라타 시 출신의 군 장교 20명으로 구성된 그룹이 쿠데타를 시도했다. 이로 인해 쿠데타 음모자들이 체포되고 처형되었다. 1977년 3월, 리비아는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가 되었다. 카다피는 공식적으로 인민총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고 이후로는 상징적인 인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수립한 새로운 자마히리야(아랍어로 "공화국") 통치 구조는 공식적으로 "직접 민주주의"라고 불렸다. 카다피는 민주 정부와 정치 철학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담아 1975년에 『녹색서』를 출판했다. 그의 짧은 책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를 베두인 우월주의 경향과 혼합하여 기록했다.
3.5.1. 통치 방식과 이념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의 통치 철학은 '자마히리야'(جماهيرية인민 대중 국가아랍어)와 제3국제이론(녹색서에서 제시됨)에 기반을 두었다. 자마히리야는 카다피가 제시한 독특한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로, 인민회의와 인민위원회를 통해 대중이 직접 국가를 운영한다는 개념이었다. 이론적으로는 권력이 중앙 정부가 아닌 지방 단위의 인민 조직에 분산되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카다피와 그의 측근들이 혁명지도위원회와 혁명위원회를 통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이었다.
녹색서(The Green Book)는 카다피의 정치, 경제, 사회 사상을 담은 책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대안적인 제3의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정치적으로는 의회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를 거부하고 인민회의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경제적으로는 임금 노동을 노예제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고 '생산의 동반자' 개념을 통해 노동자가 생산 수단의 일부를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사적 소유를 제한하고 주택은 거주자에게 속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사회적으로는 전통적인 가족 구조와 이슬람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여성의 교육과 사회 참여를 어느 정도 장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적용에 있어서 자마히리야 체제는 석유 수입을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무상 교육, 무상 의료, 주택 보조금 등 광범위한 사회 복지를 제공하는 데 일부 성공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반대파에 대한 탄압, 언론 통제, 인권 침해가 만연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석유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비효율적인 국가 주도 경제 운영으로 인해 장기적인 발전에 한계를 드러냈다. 녹색서의 이념은 학교 교육과 공공생활 전반에 걸쳐 주입되었으나, 국민들의 실질적인 정치 참여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3.5.2. 대외 관계와 국제적 고립

카다피 정권 시기 리비아의 대외 정책은 급진적인 반제국주의, 반서방 노선과 범아랍주의, 범아프리카주의를 특징으로 했다. 카다피는 자신을 아랍과 아프리카의 지도자로 자처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또한, 전 세계의 다양한 반정부 단체와 해방 운동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며 국제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리비아는 차드 내전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이집트와 국경 분쟁을 겪기도 했다. 미국과는 지속적인 갈등 관계에 놓였으며, 특히 1981년 시드라만 사건과 1986년 미국의 리비아 공습은 양국 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리비아는 1988년 팬암기 103편 폭파 사건(로커비 사건)과 1989년 UTA기 772편 폭파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국제 사회로부터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찍혔다. 이로 인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리비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 제재를 부과했고, 리비아는 국제적으로 심각한 고립 상태에 빠졌다.
1990년대 후반부터 리비아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책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로커비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협상에 응하고, 2003년에는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으로 이어졌고, 유엔 제재도 해제되었다. 이후 리비아는 국제 사회에 복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카다피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과 인권 문제 등은 여전히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에 긴장 요소로 남아 있었다. 2011년 리비아 내전 발발과 나토의 군사 개입은 이러한 관계 정상화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카다피 정권의 종말로 이어졌다.
3.5.3. 사회 경제적 영향
카다피 정권 하의 리비아는 막대한 석유 수입을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광범위한 사회 복지 혜택을 제공했다. 교육과 의료는 무상으로 제공되었으며, 정부는 주택 구입을 위한 보조금과 저리 대출을 지원했다. 식량과 연료 등 주요 생필품 가격도 국가 보조금을 통해 낮게 유지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특히 초기에는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대표적인 인프라 개발 사업으로는 사하라 사막의 지하수를 끌어와 해안 도시와 농업 지역에 공급하는 대수로 공사(Great Man-Made River)가 있다. 이 공사는 리비아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으나, 막대한 비용과 환경 문제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복지 정책과 인프라 개발은 석유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국가 경제는 다변화되지 못했다. 공공 부문이 비대해지고 비효율성이 심화되었으며, 민간 부문의 성장은 억제되었다. 석유로 인한 부는 카다피와 그의 측근, 특정 부족에게 집중되어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청년 실업률은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며, 정치적 자유와 인권은 심각하게 억압되었다. 언론 통제, 반대파 탄압, 자의적 구금과 고문 등 인권 침해 사례가 빈번했으며, 이는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비판 대상이 되었다. 카다피 정권 말기에는 경제 성장 둔화와 함께 사회적 불만이 누적되었고, 이는 2011년 반정부 시위와 내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
3.6. 제1차 리비아 내전과 카다피 정권 붕괴

2011년 초,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의 영향은 리비아에도 미쳤다. 2011년 2월 15일, 리비아 동부의 주요 도시 벵가지에서 무아마르 카다피의 42년 장기 독재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가 처음 발생했으며, 2월 17일 혁명의 날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봉기로 확산되었다. 카다피 정권은 시위대에 대한 무력 진압으로 대응했으나, 이는 오히려 저항을 격화시켜 내전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반정부 세력은 빠르게 조직화되어 2월 27일 벵가지에서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를 결성하고, 카다피 정권에 대항하는 합법 정부임을 주장했다. 카다피의 고위 보좌관 중 일부가 사임하고 반정부 세력에 합류하는 등 정권 내부의 이탈도 나타났다. 국제사회는 카다피 정권의 무력 사용을 강력히 규탄했으며, 유엔 인권 이사회는 리비아를 회원국에서 축출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다. 3월 10일, 프랑스를 시작으로 여러 국가들이 과도국가위원회를 리비아 국민의 합법적인 대표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카다피 정부군은 반군의 공세에 군사적으로 대응하여 서부 트리폴리타니아 지역에서 반격을 개시했고, 봉기의 중심지인 벵가지를 향해 해안을 따라 진격했다. 특히 트리폴리에서 48 km 떨어진 자위야 시는 공군기와 탱크로 폭격당하며 정부군에게 함락되었다.
이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2011년 3월 17일,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민간인 보호를 위해 "모든 필요한 조치"를 허용하는 결의안 1973호를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에 따라 3월 19일, 프랑스 공군이 리비아 영공에 진입하여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적대 목표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주도의 군사 개입이 시작되었다. 미국을 포함한 나토 동맹군은 리비아 방공망을 파괴하고 카다피 군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나토의 공중 지원에 힘입어 반군은 전세를 역전시켰고, 2011년 8월 22일 수도 트리폴리에 진입하여 카다피 정권의 상징이었던 녹색 광장(순교자 광장으로 개칭)을 점령했다. 카다피는 고향인 시르테로 도피하여 항전을 계속했으나, 2011년 10월 20일 시르테 전투에서 나토의 지원을 받는 반군에 의해 생포된 후 사망했다. 같은 날 과도국가위원회는 리비아 전역의 해방을 선언하며 8개월간의 내전 종식과 카다피 정권의 종말을 공식화했다. 이 내전으로 최소 3만 명의 리비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7. 과도기와 제2차 리비아 내전
토브룩 정부
국민합의정부
석유 시설 방위대
투아레그족 부족
지역 군벌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리비아는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하고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과도국가위원회(NTC)는 2012년 7월 총선을 실시하여 제헌의회(GNC)를 구성하고 8월에 권력을 이양했지만, 새 정부는 국가 통제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다양한 지역, 도시, 부족에 기반을 둔 무장 민병대들이 난립하며 중앙 정부의 권위에 도전했고, 이슬람주의 세력과 세속주의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도 심화되었다. 수피파 사원 파괴, 제2차 세계대전 영국군 묘지 훼손 등 문화유산 파괴 행위도 잇따랐다.
2012년 9월 11일에는 벵가지 주재 미국 영사관이 이슬람 무장 세력의 공격을 받아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대사를 포함한 미국인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미국과 리비아 양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총리 선출과 내각 구성도 난항을 겪었다.
2014년,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제2차 리비아 내전이 발발했다. 2014년 6월 실시된 총선에서 선출된 대표자회의(HoR, 주로 세속주의 세력)는 기존 제헌의회(GNC, 이슬람주의 세력 다수)와 대립했다. 이슬람주의 민병대가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하자 대표자회의는 동부의 토브룩으로 이전해야 했다. 이로써 리비아에는 트리폴리의 GNC(나중에 국민합의정부(GNA)로 발전)와 토브룩의 HoR이라는 두 개의 경쟁 정부가 들어서는 분열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권력 공백을 틈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를 비롯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데르나, 시르테 등지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집트 등 주변국들은 토브룩 정부를 지원하며 ISIL에 대한 공습을 감행하기도 했다.
국제 사회, 특히 유엔은 리비아의 정치적 통합을 위한 중재 노력을 지속했다. 2015년에는 유엔의 중재로 리비아 정치 협정(Skhirat Agreement)이 체결되어 국민합의정부(GNA) 수립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나, 동부의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이 이끄는 리비아 국민군(LNA)은 GNA를 인정하지 않고 군사적 압박을 계속했다.
리비아는 유럽으로 향하는 불법 이주민들의 주요 경유지가 되었으며, 2013년부터 2018년 사이 수십만 명의 이주민이 리비아를 통해 이탈리아로 향했다. 2019년 4월, 하프타르의 LNA는 트리폴리 장악을 목표로 대규모 군사 작전(서부 리비아 공세)을 개시했으나, GNA는 터키 등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했다. 2020년에는 GNA가 '평화의 폭풍 작전'을 통해 반격에 나섰다. 이 기간 동안 아랍에미리트(UAE)와 터키 등 외국 세력들이 각각 LNA와 GNA를 지원하며 유엔 무기 금수 조치를 위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20년 10월 23일, 양측은 마침내 유엔의 중재 하에 '항구적인' 정전 협정에 서명하며 길었던 제2차 내전의 종식을 알렸다.
3.7.1. 정치적 분열과 세력 다툼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리비아는 다양한 정치 세력, 군벌, 민병대 간의 복잡한 권력 투쟁의 장이 되었다. 제1차 내전 이후 과도국가위원회(NTC)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통치 기반이 취약하여 전국적인 통제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2012년 선출된 제헌의회(GNC) 역시 이슬람주의 세력과 세속주의 세력 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었다.
2014년 총선 결과에 불복한 이슬람주의 세력은 기존 제헌의회를 중심으로 트리폴리에 독자적인 정부(국민구제정부, 후에 국민합의정부(GNA)로 발전)를 수립했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대표자회의(HoR)는 동부 토브룩으로 이전하여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이 이끄는 리비아 국민군(LNA)의 지원을 받았다. 이로써 리비아는 사실상 동서로 양분되었으며, 두 정부는 각기 다른 외국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대립했다. GNA는 주로 터키와 카타르의 지원을 받았고, LNA는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러시아, 프랑스 등의 지원을 받았다.
이 외에도 미스라타, 진탄 등 주요 도시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민병대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특정 정치 세력과 연대하거나 때로는 대립하며 정국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켰다. 투아레그족과 투부족 등 소수 민족 기반의 무장 세력들도 국경 지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 안사르 알샤리아 등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들이 권력 공백을 틈타 데르나, 시르테 등지에서 활동하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다층적인 분열과 세력 다툼은 부족주의, 지역주의, 이념 대립, 그리고 석유 자원을 둘러싼 이권 다툼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촉발되고 지속되었다. 각 세력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무력 충돌을 반복했고, 이는 국가 기능 마비와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했다.
3.7.2. 국제 사회의 개입과 평화 노력

리비아 내전 발발 이후 국제 사회는 리비아의 안정과 평화 회복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유엔(UN)은 리비아 지원 임무단(UNSMIL)을 통해 정치적 대화 촉진, 인도적 지원, 인권 상황 감시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평화 중재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내전 당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1973호를 통해 민간인 보호를 명분으로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모든 필요한 조치를 승인했으며, 이는 나토(NATO)의 군사 개입으로 이어져 카다피 정권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자, 유엔은 경쟁하는 정치 세력 간의 대화를 중재하여 통합 정부 구성을 시도했다. 2015년 모로코 시히라트에서 체결된 리비아 정치 협정(Skhirat Agreement)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 이를 통해 국민합의정부(GNA)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모든 주요 세력의 완전한 동의를 얻지 못했고, 특히 칼리파 하프타르가 이끄는 리비아 국민군(LNA)은 GNA를 인정하지 않아 내전은 계속되었다.
주요 관련국들은 리비아 문제에 대해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개입했다.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러시아, 프랑스 등은 주로 LNA를 지원한 반면, 터키와 카타르는 GNA를 지원했다. 이러한 외부 세력의 개입은 내전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장기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양측에 대한 무기 공급이 지속되었다.
국제 사회는 리비아의 인도주의적 위기에도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유엔 기구들과 국제 NGO들은 난민과 국내 실향민에 대한 지원 활동을 펼쳤다. 또한, 인권 침해 사례에 대한 조사와 책임 규명 노력도 이루어졌다.
2020년 10월, 유엔의 중재로 GNA와 LNA 간의 항구적인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후 리비아 정치 대화 포럼(LPDF)을 통해 2021년 3월 국민통합정부(GNU)가 출범하는 등 정치적 통합을 향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선거 일정 지연, 정부 구성에 대한 이견 등으로 인해 여전히 정치적 불안정은 지속되고 있으며, 국제 사회는 리비아의 안정적인 민주주의 이행을 위한 지원과 압력을 계속하고 있다.
3.8. 내전 이후와 현재

2020년 10월, 유엔의 중재로 경쟁하던 두 주요 파벌(국민합의정부와 리비아 국민군) 간에 항구적인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제2차 리비아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이후 리비아 정치 대화 포럼(LPDF)을 통해 과도기 정부 구성 논의가 진행되었고, 2021년 2월 압둘 하미드 드베이베를 총리로 하는 국민통합정부(GNU)가 출범하여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국민통합정부의 주요 임무는 분열된 국가 기관을 통합하고 2021년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와 총선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거법, 후보 자격 등을 둘러싼 정치 세력 간의 이견으로 인해 2021년 12월 선거는 연기되었고, 이는 리비아의 정치적 불안정을 다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22년 2월, 동부 토브룩에 기반을 둔 대표자회의(HoR)는 국민통합정부의 임기가 만료되었다고 주장하며 파티 바샤가를 새로운 총리로 임명하려 했으나, 드베이베 총리는 이를 거부하며 권력 이양을 둘러싼 갈등이 재현되었다. 한동안 리비아에는 다시 두 개의 정부가 병존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정치적 교착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2022년 7월에는 경제난과 정치 불안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토브룩의 대표자회의 건물을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23년 9월에는 허리케인 다니엘의 영향으로 동부 데르나 지역의 댐 두 곳이 붕괴하면서 대규모 홍수가 발생하여 최소 5,900명 이상, 많게는 24,000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리비아 현대사 최악의 자연재해로 기록되었으며, 정치적 분열 상황이 재난 대응과 구호 활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현재까지도 리비아는 정치적 통합과 안정적인 국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총선 및 대선 일정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이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지속적으로 중재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내부 정치 세력 간의 불신과 외부 세력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단기간 내 안정 회복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2024년 11월, 국민통합정부는 "기이한 머리 모양" 단속, "단정한" 복장 의무화, 여성의 남성 보호자 동반 요구 등을 포함하는 도덕 경찰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4. 지리
리비아는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하며, 면적은 약 175.95 만 km2로 아프리카에서 4번째, 세계에서 16번째로 큰 나라이다. 북쪽으로는 지중해와 약 1770 km에 달하는 긴 해안선을 맞대고 있으며, 이는 아프리카 국가 중 지중해에 접한 가장 긴 해안선이다. 동쪽으로는 이집트, 남동쪽으로는 수단, 남쪽으로는 차드와 니제르, 서쪽으로는 알제리, 북서쪽으로는 튀니지와 국경을 접한다. 리비아는 북위 19도에서 34도, 동경 9도에서 26도 사이에 위치한다.
국토의 대부분(약 90% 이상)은 사하라 사막의 일부인 리비아 사막으로 덮여 있어 매우 건조한 사막 기후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북부 지중해 연안 지역은 상대적으로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낸다. 리비아의 지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북서부의 트리폴리타니아, 동부의 키레나이카, 남서부의 페잔이다.
주요 자연재해로는 봄과 가을에 1일에서 4일간 지속되는 뜨겁고 건조하며 먼지를 동반한 남풍인 시로코(리비아에서는 '기블리'라고 불림)가 있다. 또한 모래폭풍도 자주 발생한다. 리비아 전역에는 오아시스가 흩어져 있으며, 그중 가다메스와 쿠프라가 가장 중요하다. 리비아는 사막 환경이 우세하여 세계에서 일조량이 가장 많고 건조한 국가 중 하나이다.
리비아에는 6개의 생태 지역이 존재한다: 사하라 염생초지, 지중해 건조 삼림지 및 스텝, 지중해 삼림지 및 숲, 북사하라 스텝 및 삼림지, 티베스티-자발 우웨이나트 산악 건조 삼림지, 서사하라 산악 건조 삼림지.
4.1. 지형과 기후
리비아의 지형은 크게 지중해 연안 지대, 내륙의 광활한 사막 지대, 그리고 남부의 산악 지대로 구분된다. 북부 지중해 연안은 좁은 평야 지대로, 트리폴리 주변의 제파라 평원과 벵가지 동쪽의 아크다르 산맥(녹색 산맥) 지역이 비교적 비옥하다. 아크다르 산맥은 해발 900 m까지 이르며, 리비아에서 가장 습윤한 지역 중 하나이다.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륙은 리비아 사막으로, 거대한 모래 언덕(에르그), 암석 사막(하마다), 자갈 사막(레그) 등 다양한 사막 지형이 나타난다. 남부에는 차드와의 국경 부근에 티베스티 산맥의 일부가 걸쳐 있으며, 이곳에는 리비아 최고봉인 비쿠 비티(Bikku Bitti, 2267 m)가 위치한다. 또한, 남동부에는 자발 우웨이나트와 같은 고립된 산괴들이 있다.
리비아의 기후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지중해 연안 지역은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온화하고 비가 다소 내리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 강수량은 트리폴리 약 300 mm, 벵가지 약 250 mm이며, 아크다르 산맥 지역은 400 mm에서 600 mm에 이른다.
내륙의 사막 지역은 극심한 사막 기후로, 연중 매우 건조하고 일교차가 크다. 여름에는 기온이 40 °C를 훌쩍 넘는 경우가 흔하며, 겨울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기도 한다. 1922년 9월 13일, 트리폴리 남서쪽의 알 아지지야에서는 세계 최고 기온인 58 °C가 기록되기도 했으나, 이 기록은 2012년 세계기상기구(WMO)에 의해 공식적으로 무효화되었다. 사막 지역의 연 강수량은 극히 적어 일부 지역에서는 수십 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기도 한다.
남부 산악 지대는 고도가 높아 기온이 다소 낮지만 여전히 건조한 기후를 보인다.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바람인 기블리(시로코)는 봄과 가을에 모래폭풍을 동반하며 북부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4.2. 리비아 사막

리비아 사막은 사하라 사막의 북동쪽 부분을 차지하며, 리비아 국토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광대한 건조 지대이다. 이집트 서부 사막과 수단 북서부 사막과도 연결되어 있다. 리비아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하고 햇볕이 강렬한 지역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십 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고지대에서조차 강우는 매우 드물어 5~10년에 한 번 정도 발생한다. 예를 들어, 우웨이나트 산에서는 1998년 9월 이후 2006년까지 비가 기록되지 않았다.
리비아 사막의 기온은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다. 1922년 9월 13일, 트리폴리 남서쪽에 위치한 알 아지지야 마을에서는 한때 세계 최고 기온으로 여겨졌던 58 °C가 기록되었으나, 이 기록은 2012년 세계기상기구(WMO)에 의해 측정 오류로 판명되어 무효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철 낮 기온은 매우 높으며, 겨울철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하여 일교차가 매우 크다.
리비아 사막에는 몇몇 작은 오아시스들이 흩어져 있으며, 이들은 주로 주요 저지대와 연결되어 지하 몇 피트만 파도 물을 찾을 수 있다. 서부에는 쿠프라 그룹으로 알려진 서로 연결되지 않은 얕은 저지대에 넓게 흩어진 오아시스 군이 있는데, 여기에는 타제르보, 레비아나, 쿠프라 오아시스가 포함된다. 사막의 평탄한 지형은 중앙부, 이집트-수단-리비아 국경이 만나는 지점 근처의 고원과 산괴들에 의해서만 간간이 끊어진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아르케누, 우웨이나트, 키수 산괴들이 있다. 이 화강암 산들은 주변의 사암보다 훨씬 오래전에 형성된 고대 지형이다. 아르케누와 서부 우웨이나트는 아이르 산맥의 환상 복합체와 매우 유사하다. 동부 우웨이나트(리비아 사막의 최고점)는 서쪽의 화강암 부분에 인접한 융기된 사암 고원이다. 우웨이나트 북쪽 평야에는 침식된 화산 지형들이 점재한다. 1950년대 석유 발견과 함께 리비아 대부분 지역 지하에 거대한 누비아 사암 대수층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발견되었다. 이 대수층의 물은 마지막 빙하기와 사하라 사막 자체보다도 오래된 것이다. 이 지역에는 한때 두 개의 운석 충돌구로 여겨졌던 아르케누 구조도 포함되어 있다.
4.3. 생태와 환경 문제
리비아의 생태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 관계로 매우 척박하지만, 지중해 연안과 일부 산악 지역에는 독특한 동식물군이 서식하고 있다. 해안 지역에는 지중해성 관목과 초목이 자라며, 아카시아, 주니퍼, 타마리스크 등이 대표적이다. 아크다르 산맥 지역은 비교적 강수량이 많아 소나무, 사이프러스 등의 삼림이 형성되어 있다. 사막 지역에는 건조한 환경에 적응한 대추야자, 에셀나무 등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분포하며, 다양한 종류의 선인장과 다육식물도 발견된다.
야생 동물로는 사막여우, 자칼, 하이에나, 가젤, 영양 등 사막 환경에 적응한 포유류와 다양한 파충류(도마뱀, 뱀), 조류(매, 독수리, 철새)가 서식한다. 지중해 연안에는 바다거북 산란지가 있으며, 다양한 해양 생물도 존재한다.
그러나 리비아는 심각한 환경 문제에 직면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사막화로, 과도한 방목, 무분별한 경작지 확대,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해 사막 지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물 부족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연 강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지하수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대수로 공사를 통해 남부 사막의 화석수를 끌어다 쓰고 있지만 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해결책이라는 비판이 있다. 세계적으로도 리비아는 물 스트레스가 매우 높은 국가 중 하나로 분류된다.
내전 이후에는 밀렵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카다피 정권 붕괴 이전에는 사냥총 소지조차 금지되었으나, 2011년 이후 전쟁 무기와 정교한 차량을 이용한 밀렵이 성행하고 있다. 민병대들이 여가 삼아 사냥을 하며 가젤 수백 마리를 사살하는가 하면, 전통적으로 사냥을 해오던 부족과 무관한 새로운 사냥꾼들이 등장하여 번식기에도 가리지 않고 모든 동물을 사냥하고 있다. 이로 인해 매년 50만 마리 이상의 조류가 희생되고 있으며, 과거 보호구역이었던 곳들도 부족 지도자들이 사유화하면서 그곳에 살던 동물들이 사라지고 있다. 1975년 엘 쿠프 보호구역을 지정하는 등 한때 북아프리카에서 종 보호의 선구자였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이 외에도 해안 지역의 수질 오염, 석유 생산으로 인한 토양 오염, 폐기물 처리 문제 등도 리비아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환경 과제이다.
4.4. 주요 도시
리비아의 인구는 주로 북부 지중해 연안의 주요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주요 도시들은 역사적으로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현대에 와서는 정치, 경제, 산업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트리폴리 (طرابلس타라불루스아랍어): 리비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북서부 트리폴리타니아 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1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2024년 기준). 고대 페니키아 시대부터 항구 도시로 발전했으며, 로마 시대에는 '오에아'로 불리며 '트리폴리스'(세 도시)의 하나로 번영했다. 역사 유적과 현대적인 건물이 공존하며, 리비아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다. 주요 산업으로는 금융, 무역, 제조업, 관광업 등이 있다. 미티가 국제공항이 주요 관문 역할을 한다.
- 벵가지 (بنغازي반가지아랍어): 리비아 제2의 도시로, 동부 키레나이카 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7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2024년 기준). 고대 그리스 식민 도시 '에우헤스페리데스'(후에 베레니케)에서 유래했으며, 리비아 왕국 시절에는 트리폴리와 함께 공동 수도였다. 동부 지역의 경제 및 문화 중심지이며, 항구 도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벵가지 베니나 국제공항이 있다. 2011년 리비아 내전 당시 반정부 봉기의 발원지였으며, 이후 정치적 혼란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 미스라타 (مصراتة미스라타아랍어): 리비아 제3의 도시로, 트리폴리 동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4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2024년 기준). 리비아의 주요 상업 및 산업 도시 중 하나로, 자유무역항과 제철소를 보유하고 있다. 2011년 내전 당시 카다피 군과 반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도 강력한 민병대의 근거지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
- 알바이다 (البيضاء알바이다으아랍어): 동부 아크다르 산맥에 위치한 도시로, 해발고도가 높아 비교적 시원한 기후를 보인다. 리비아 왕국 시절 한때 수도였으며, 사누시 교단의 역사적 중심지이기도 하다. 오마르 알무크타르 대학교가 위치해 있어 교육 도시의 성격도 지닌다.
- 시르테 (سرت수르트아랍어): 리비아 중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며, 무아마르 카다피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내전 당시 카다피 최후의 항전지였으며, 이후 ISIL이 장악하는 등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 외에도 사브하(페잔 지역의 중심 도시), 토브룩(동부 국경 근처의 항구 도시), 자위야(트리폴리 서쪽의 석유 산업 도시) 등이 주요 도시로 꼽힌다.
5. 정치


리비아의 정치는 2011년 아랍의 봄과 NATO의 개입으로 시작된 리비아 위기 이후 극심한 혼란 상태에 놓여 있다. 이 위기는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붕괴와 제1차 내전 및 외국의 군사 개입 와중에 무아마르 카다피가 살해되는 결과를 낳았다. 제1차 내전 이후의 파벌 간 폭력으로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고, 2014년 제2차 내전이 발발했다. 현재 국가 통제권은 토브룩의 대표자회의(HoR)와 트리폴리의 국민통합정부(GNU) 및 각자의 지지 세력, 그리고 국가의 여러 지역을 통제하는 다양한 지하디스트 단체와 부족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
이전 입법부는 200석 규모의 총국민회의(GNC)였다. 법적 수도인 트리폴리에 기반을 둔, 대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쟁 의회인 총국민회의(2014년)는 GNC의 법적 연속체라고 주장한다. 2012년 7월 7일, 리비아인들은 거의 40년 만의 첫 자유 선거인 의회 선거에 참여했다. 약 30명의 여성이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투표 초기 결과에서는 마흐무드 지브릴 전 임시 총리가 이끄는 국민세력연합이 선두를 달렸다. 무슬림 형제단과 연계된 정의건설당은 이집트와 튀니지의 유사 정당들보다 성과가 저조했다. 정당들이 경쟁한 80석 중 17석을 얻었으나, 이후 약 60명의 무소속 의원이 그들의 간부회에 합류했다. 2013년 1월 현재,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한 기초 기구 설립에 대한 국민회의의 대중적 압력이 커지고 있었다. 의회는 아직 기구 구성원들을 선출할지 임명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2014년 3월 30일, 총국민회의는 새 대표자회의로 대체하기로 의결했다. 새 입법부는 여성에게 30석을 할당하며, 총 200석(개인이 정당원으로 출마 가능)을 갖고 외국 국적의 리비아인도 출마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2012년 선거 이후, 프리덤 하우스는 리비아의 등급을 '자유롭지 않음'에서 '부분적으로 자유로움'으로 개선했으며, 현재 이 나라를 선거 민주주의 국가로 간주한다. 카다피는 1973년에 민사 법원과 샤리아 법원을 통합했다. 민사 법원은 현재 정규 항소 법원에서 근무하며 샤리아 항소 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샤리아 판사들을 고용하고 있다. 개인 신분에 관한 법률은 이슬람법에서 파생된다.
2014년 12월 2일 유럽 의회 외교위원회 회의에서 베르나르디노 레온 유엔 특별대표는 리비아를 비국가(non-state)로 묘사했다. 2015년 12월 17일 국민통합정부 구성 합의안이 서명되었다. 합의 조건에 따라 9명의 대통령위원회와 17명의 임시 국민합의정부가 구성되어 2년 이내에 새 선거를 치를 예정이었다. 대표자회의는 입법부로 계속 존재하며, 국가 최고위원회로 알려질 자문 기구는 총국민회의(2014년)가 지명한 구성원들로 구성될 것이었다.
2021년 2월 5일, 리비아 정치 대화 포럼(LPDF)에서 구성원들이 선출된 후 임시 통합정부 구성이 발표되었다. LPDF 회원 74명은 총리와 대통령위원회 위원장직을 채울 4명으로 구성된 명단에 투표했다. 어떤 명단도 60%의 득표율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자, 두 주요 팀이 결선 투표에서 경쟁했다. 전 그리스 대사였던 모하메드 알멘피가 대통령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한편, LPDF는 사업가인 압둘 하미드 드베이베가 과도 총리가 될 것이라고 확인했다. 이번 선거에 출마한 모든 후보자들은 정부 고위직의 30%에 여성을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임시 정부를 이끌도록 선출된 정치인들은 처음에 2021년 12월 24일로 예정된 전국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압둘 하미드 드베이베는 2021년 11월 금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후보 출마를 발표했다. 트리폴리 항소 법원은 그의 자격 박탈에 대한 항소를 기각하고, 드베이베와 원래 12월 24일로 예정되었던 여러 다른 자격 박탈 후보자들을 후보자 명단에 다시 포함시켰다. 더욱 논란이 된 것은 법원이 전 독재자의 아들인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를 대통령 후보로 복권시킨 것이다. 2021년 12월 22일, 리비아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를 2022년 1월 24일로 연기할 것을 요구했다. 앞서 의회 위원회는 2021년 12월 24일에 선거를 치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유엔은 리비아 임시 지도자들에게 "대통령 후보자 명단 확정을 포함하여 선거 개최에 대한 모든 법적, 정치적 장애물을 신속하게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선거는 무기한 연기되었고, 국제 사회는 드베이베 씨가 이끄는 임시 정부에 대한 지원과 인정을 계속하기로 합의했다. 새 선거 규정에 따르면, 새 총리는 21일 이내에 리비아 내 여러 통치 기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이 내각이 합의되면, 통합 정부는 트리폴리의 국민합의정부와 하프타르 장군이 이끄는 행정부를 포함한 리비아 내 모든 "병행 당국"을 대체할 것이다.
5.1. 정부 구조와 현황
2024년 현재 리비아는 정치적으로 과도기적 상황에 있으며, 완전한 통합 정부 구조를 확립하지 못한 상태이다. 2021년 3월 출범한 국민통합정부(GNU, Government of National Unity)가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 있으나, 국내적으로는 여전히 정치적 분열과 도전이 지속되고 있다.
국민통합정부는 총리 압둘 하미드 드베이베가 이끌고 있으며, 행정수반 역할을 한다. 국가 원수 역할은 3인으로 구성된 대통령위원회(Presidential Council)가 맡고 있으며, 의장은 모하메드 알멘피이다. 국민통합정부와 대통령위원회는 2020년 정전 협정 이후 리비아 정치 대화 포럼(LPDF)의 결과로 구성되었으며, 주요 임무는 국가 기관 통합, 서비스 제공, 그리고 지연되고 있는 전국적인 대통령 선거 및 총선 실시였다.
입법 기관으로는 동부 토브룩에 기반을 둔 대표자회의(HoR, House of Representatives)가 있다. 대표자회의는 2014년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으며, 국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합법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론적으로 국민통합정부는 대표자회의의 신임을 받아야 하지만, 양측 간의 관계는 긴장과 대립이 반복되는 양상을 보여왔다. 2022년 대표자회의는 국민통합정부의 임기가 만료되었다고 주장하며 파티 바샤가를 총리로 하는 별도의 정부(국민안정정부, GNS)를 지지하기도 했으나, 이 정부는 국제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실질적인 통치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과거 트리폴리에 기반을 두었던 국민합의정부(GNA) 시절의 자문기구였던 국가최고위원회(High Council of State)가 여전히 존재하며, 대표자회의와 함께 헌법적 기반 및 선거법 마련 등에 관여하고 있다.
리비아의 정치적 불안정은 여러 요인에서 비롯된다.
1. 정치 세력 간의 깊은 불신과 권력 다툼: 다양한 지역 기반, 부족 기반, 이념 기반의 정치 세력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며 통합을 저해하고 있다.
2. 무장 세력의 영향력: 강력한 민병대와 군벌들이 여전히 각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3. 헌법적 기반 부재: 새로운 헌법이 아직 제정되지 않아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이 확립되지 못하고 있으며, 선거법 등 주요 법률에 대한 합의도 지연되고 있다.
4. 외부 세력의 개입: 리비아의 석유 자원과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여러 외국 세력들이 각기 다른 파벌을 지원하며 정세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5. 경제난과 사회 불안: 석유 생산 차질, 부정부패, 높은 실업률 등으로 인한 경제난과 사회적 불만이 정치 불안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리비아는 국가 재건, 민주주의 정착, 안보 확립, 경제 회복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으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지속적인 중재와 지원을 통해 리비아의 안정화를 도모하고 있다.
5.2. 주요 정치 세력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리비아는 다수의 정치 파벌, 군사 조직, 부족 세력들이 복잡하게 얽혀 경쟁하는 구도를 보여왔다. 현재 리비아의 주요 정치 세력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국민통합정부(GNU) 및 지지 세력: 2021년 리비아 정치 대화 포럼(LPDF)을 통해 출범했으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총리 압둘 하미드 드베이베가 이끌고 있으며, 주로 수도 트리폴리를 비롯한 서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민병대와 정치 그룹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특히 미스라타 지역의 강력한 군사 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터키가 주요 외부 지원국으로 꼽힌다.
2. 대표자회의(HoR) 및 리비아 국민군(LNA): 동부 토브룩에 기반을 둔 의회인 대표자회의와 그 산하 군사 조직인 리비아 국민군은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이 이끌고 있다. 주로 동부와 남부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러시아, 프랑스 등이 전통적으로 이들을 지원해왔다. 대표자회의는 국민통합정부의 정통성에 대해 종종 이의를 제기하며 정치적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3. 부족 세력: 리비아 사회는 전통적으로 부족 중심 구조가 강하며, 각 부족은 특정 지역에서 상당한 사회적,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 와르팔라(Warfalla), 마가르하(Magarha), 주와이야(Zwayya) 등 주요 부족들은 국가적 현안에 대해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특정 정치 세력과 연대하기도 한다. 특히 석유 시설이 위치한 지역의 부족들은 자원 통제권을 놓고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4. 지역 기반 민병대: 2011년 내전 이후 각 도시와 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민병대가 결성되었다. 미스라타, 진탄, 자위야 등지의 민병대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역 안보와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이들은 때로는 중앙 정부와 협력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독자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5. 이슬람주의 세력: 과거 무슬림 형제단과 연계된 정의건설당 등이 정치적으로 활동했으며, 더 급진적인 살라피스트 계열이나 지하디스트 성향의 무장 단체들도 일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해왔다. ISIL과 같은 극단주의 조직은 2010년대 중반 시르테 등지에서 세력을 확장했으나 이후 대부분 격퇴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지역에서 산발적인 활동이 보고되고 있다.
6. 카다피 지지 세력 (녹색 저항군 등): 카다피 정권 시절의 관료, 군인, 지지자들 중 일부는 여전히 잠재적인 정치 세력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과거 체제에 대한 향수나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을 바탕으로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며,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와 같은 인물이 정치적 복귀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세력들은 리비아의 정치적 안정과 통합을 어렵게 만드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역학 관계와 협상, 그리고 갈등이 리비아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5.3. 행정 구역
리비아의 행정 구역 체계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변화를 겪어왔다. 전통적으로 리비아는 북서부의 트리폴리타니아, 동부의 키레나이카(바르카), 남서부의 페잔이라는 세 개의 주요 역사적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에서 이탈리아가 승리하면서 이 세 지역이 단일 정치 단위로 통합되었다.
카다피 정권 시절에는 샤비야(شعبية, shabiyah, 복수형 shabiyat)라는 독특한 행정 구역 단위를 사용했다. 이는 '인민성' 또는 '대중성'을 의미하며, 이론적으로는 인민회의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기본 단위였다. 샤비야의 수는 여러 차례 조정되었는데, 2007년에는 기존 32개에서 22개의 샤비야로 재편되었다. 2007년 기준 22개 샤비야는 다음과 같다:
- 1. 누카트 알함스
- 2. 자위야
- 3. 지파라
- 4. 트리폴리
- 5. 무르쿠브
- 6. 미스라타
- 7. 시르테
- 8. 벵가지
- 9. 마르지
- 10. 자발 알 아크다르
- 11. 데르나
- 12. 부트난(과거 토브룩주)
- 13. 날루트
- 14. 자발 알 가르비
- 15. 와디 알 샤티
- 16. 주프라
- 17. 알 와하트
- 18. 가트
- 19. 와디 알 하야
- 20. 사브하
- 21. 무르주크
- 22. 쿠프라
2011년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행정 구역 개편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2013년에는 발라디야트(baladiyat, 지방 자치체)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22년, 트리폴리에 기반을 둔 국민통합정부(GNU)는 리비아를 18개의 새로운 주(province)로 나누는 행정 구역 개편안을 발표했다. 이 새로운 18개 주는 다음과 같다: 동부 해안주, 자발 알 아크다르주, 알 히잠주, 벵가지주, 알 와하트주, 알 쿠프라주, 알 칼리즈주(걸프주), 알 마르갑주, 트리폴리주, 알 자파라주, 알 자위야주, 서부 해안주, 게리안주, 진탄주, 날루트주, 사브하주, 알 와디주, 무르주크 분지주.
그러나 이러한 행정 구역 개편안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실효성 있게 적용되고 있는지는 정치적 분열 상황으로 인해 불분명하다. 실질적인 지방 행정은 지역 민병대나 부족 세력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경우가 많으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도 상당수 존재한다.
5.4. 대외 관계


리비아의 대외 정책은 1951년 독립 이후 극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왕정 시대(1951-1969)에는 친서방 노선을 견지하며 영국,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53년 아랍 연맹에 가입했으며, 보수적 전통주의 블록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 시기 리비아는 모로코와 알제리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등 아랍의 대의에는 동조했으나, 아랍-이스라엘 분쟁이나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의 격동적인 아랍 국가 간 정치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1969년 무아마르 카다피의 쿠데타 이후 리비아의 대외 정책은 급진적으로 전환되었다. 카다피는 미군과 영국군 기지를 폐쇄하고 외국 석유 및 상업 자산을 부분적으로 국유화했다. 그는 반제국주의, 반서방, 범아랍주의, 범아프리카주의를 표방하며, 이디 아민(우간다), 장베델 보카사(중앙아프리카 제국),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에티오피아), 찰스 테일러(라이베리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유고슬라비아) 등 서방에 적대적인 지도자들을 지원했다. 또한 전 세계의 다양한 반정부 단체 및 무장 단체에 자금과 훈련을 제공하여 테러 지원국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정책은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특히 1986년 베를린 디스코텍 폭탄 테러와 미국의 리비아 공습, 1988년 팬암기 103편 폭파 사건(로커비 사건) 등으로 인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리비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 제재를 부과했다. 이로 인해 리비아는 1990년대 내내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카다피 정권은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책 전환을 시도했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프로그램 포기를 선언하고 로커비 사건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면서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에 따라 유엔 제재가 해제되고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도 점차 정상화되었다. 카다피는 한때 아랍 국가들의 아프리카 노예 무역 가담에 대해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2011년 리비아 내전 발발과 나토의 군사 개입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된 이후, 리비아의 대외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과도 정부와 이후 등장한 여러 경쟁 정부들은 국제 사회의 인정과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내전 과정에서 다양한 외부 세력들이 리비아 문제에 개입하면서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현재 국민통합정부(GNU)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 있으나, 국가의 완전한 안정과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대외 관계 역시 유동적인 상황이다.
리비아는 유엔, 비동맹 운동, 아프리카 연합, 아랍 연맹, 이슬람 협력 기구(OIC), OPEC의 회원국이다. 유럽 연합의 유럽 인근 정책(ENP)에도 포함되어 있으나, 유럽으로 향하는 이주민 문제와 관련하여 EU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2017년에는 유엔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5.5. 군사
카다피 정권 시절의 리비아군은 상당한 규모와 장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2011년 내전 과정에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리비아의 군사 부문은 극심한 분열과 혼란을 겪고 있다.
내전 이후 과도국가위원회(NTC)와 이후 정부들은 국가적인 통합 군대를 재건하려 노력했지만, 다양한 지역 기반 민병대와 군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중앙 정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2014년 제2차 리비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러한 분열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현재 리비아에는 크게 두 개의 주요 군사 세력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1. 리비아 국민군(LNA): 주로 동부 토브룩에 기반을 둔 대표자회의(HoR)를 지지하는 군사 조직으로,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이 총사령관을 맡고 있다. LNA는 과거 리비아군 출신 장교들과 병사들, 그리고 지역 민병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러시아 등의 지원을 받아왔다. 리비아 동부와 남부 대부분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 국민통합정부(GNU) 산하 군사력: 수도 트리폴리에 기반을 둔 국민통합정부는 자체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이는 정규군이라기보다는 GNU를 지지하는 다양한 서부 지역 민병대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하다. 미스라타, 자위야 등지의 강력한 민병대들이 핵심을 이루며, 터키의 군사적 지원을 받고 있다.
이 외에도 특정 도시나 부족을 기반으로 하는 다수의 소규모 무장 단체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 세력과 연합하거나 독자적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유엔의 중재로 2020년 정전 협정이 체결되고 통합 정부 수립 노력이 진행 중이지만, 전국적인 단일 지휘 체계를 갖춘 통합 군대 창설은 여전히 큰 과제로 남아 있다.
무기 또한 2011년 내전 당시 카다피 군의 무기고에서 유출된 다량의 무기가 암시장을 통해 주변국과 다른 분쟁 지역으로 확산되어 지역 안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2012년 5월 기준으로는 약 35,000명의 인원이 새로운 군대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이는 초기 단계의 수치이며 이후 상황은 매우 유동적이었다. 모하메드 마가리아프 당시 대통령은 군과 경찰력 강화가 정부의 최우선 과제라고 약속하며 모든 민병대가 정부 권한 하에 들어오거나 해산해야 한다고 명령했지만, 실질적인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비아 방패군'과 같은 민병대 연합체는 국방부의 명령보다는 요청에 따라 움직이는 평행적인 국가 군사력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5.6. 인권
리비아의 인권 상황은 카다피 정권 시절부터 심각한 우려의 대상이었으며, 2011년 내전 이후 정치적 혼란과 무장 세력의 난립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카다피 정권 시기 (1969-2011):
무아마르 카다피의 42년 통치 기간 동안 리비아는 극심한 인권 탄압을 겪었다. 표현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었으며, 정적과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자의적 구금, 고문, 실종, 초법적 살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었고, 독립적인 시민 사회 단체의 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사법부는 독립성을 갖지 못하고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전 이후 (2011-현재):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에도 리비아의 인권 상황은 개선되지 못하고 여러 측면에서 더욱 심각해졌다.
- 표현의 자유 및 언론 탄압: 휴먼 라이츠 워치 2016년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언론인들은 여전히 무장 단체의 표적이 되고 있다. 2015년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언론 자유 지수에서 리비아는 180개국 중 154위로 매우 낮은 순위를 기록했으며, 2021년에는 165위로 더욱 하락했다. 언론인에 대한 납치, 살해 위협, 폭행 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자의적 구금 및 고문: 경쟁하는 정부와 민병대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구금하고 있으며, 구금 시설 내에서의 고문과 비인도적 처우가 만연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 사법 시스템 붕괴: 사법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어 법의 지배가 확립되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인권 침해 가해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있다.
- 이주민 및 난민 인권: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주요 경유지로, 수많은 이주민과 난민들이 인신매매, 강제 노동, 성폭력, 고문 등 심각한 인권 침해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을 수용하는 구금 시설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며, 비인도적인 대우가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국제적인 비판이 높다.
- 소수자 권리: 리비아에서 동성애는 불법이며, 성소수자(LGBT)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박해가 심각하다. 베르베르인 등 소수 민족의 문화적, 언어적 권리도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 여성 권리: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 문제도 여전히 존재하며, 정치 참여나 사회 활동에 있어 여성의 역할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 무력 분쟁으로 인한 인권 침해: 지속되는 무력 충돌로 인해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강제 이주, 재산 파괴 등 인도주의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휴먼 라이츠 워치 등 국제 인권 단체들은 리비아의 인권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명하며, 모든 무장 세력과 정부 당국에 국제인권법 및 국제인도법 준수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적인 안정과 통합된 통치 구조가 부재한 상황에서 실질적인 인권 개선은 요원한 실정이다.
6. 경제
리비아 경제는 주로 석유 부문 수입에 의존하며,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이상과 수출의 97%를 차지한다.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확인된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경질 저유황 원유의 세계 공급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2010년 유가가 배럴당 평균 80달러였을 때 석유 생산은 GDP의 54%를 차지했다. 석유 외의 다른 천연자원으로는 천연가스와 석고가 있다. 국제 통화 기금(IMF)은 2011년 60% 급락 후 2012년 리비아의 실질 GDP 성장률을 122%, 2013년에는 16.7%로 추정했다.
세계은행은 리비아를 아프리카의 7개국과 함께 '중상위 소득 경제'로 분류한다. 에너지 부문의 상당한 수입과 적은 인구 덕분에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이는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가가 특히 주택 및 교육 분야에서 광범위한 수준의 사회 보장을 제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리비아는 제도 부족, 취약한 거버넌스, 만성적인 구조적 실업 등 많은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경제는 경제 다각화 부족과 이민 노동력에 대한 상당한 의존도를 보인다. 리비아는 전통적으로 고용 창출을 위해 지속 불가능한 수준의 높은 공공 부문 고용에 의존해 왔다. 2000년대 중반 정부는 전체 국내 고용인의 약 70%를 고용했다.
실업률은 2008년 8%에서 2009년 21%로 증가했다고 인구 조사 수치는 밝혔다. 아랍 연맹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데이터 기준으로 여성 실업률은 18%인 반면 남성 실업률은 21%로, 리비아는 남성 실업자가 여성보다 많은 유일한 아랍 국가이다. 리비아는 사회적 불평등 수준이 높고, 청년 실업률이 높으며, 지역 간 경제적 격차가 크다. 물 공급 또한 문제로, 2000년에는 인구의 약 28%가 안전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했다.
아프리카 횡단 자동차 경로 두 개가 리비아를 통과하며, 여기에는 카이로-다카르 고속도로와 트리폴리-케이프타운 고속도로가 포함된다. 이러한 경로는 리비아의 경제 발전에 더욱 기여했다.
리비아는 곡물 소비량의 최대 90%를 수입하며, 2012/13년 밀 수입량은 100만 톤으로 추정되었다. 2012년 밀 생산량은 20만 톤으로 추정되었다. 정부는 2020년까지 식량 생산량을 80만 톤의 곡물로 늘리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자연 및 환경 조건이 리비아의 농업 생산 잠재력을 제한한다. 1958년 이전에는 농업이 국가 수입의 주요 원천으로 GDP의 약 30%를 차지했다. 1958년 석유 발견으로 농업 부문의 규모는 급격히 감소하여 2005년에는 GDP의 5% 미만을 차지했다.
리비아는 1962년에 OPEC에 가입했다. 리비아는 WTO 회원국이 아니지만, 가입 협상은 2004년에 시작되었다. 1980년대 초, 리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였으며, 1인당 GDP는 일부 선진국보다 높았다.
2000년대 초, 자마히리야 시대 관리들은 리비아를 세계 경제에 재통합하기 위한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유엔 제재는 2003년 9월에 해제되었고, 리비아는 2003년 12월에 대량 살상 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른 조치로는 세계 무역 기구(WTO) 가입 신청, 보조금 삭감, 민영화 계획 발표 등이 있었다.
당국은 2003년 이후 정유, 관광, 부동산 등 산업 분야에서 100개 이상의 국영 기업을 민영화했으며, 그중 29개는 100% 외국인 소유였다. 로열 더치 셸과 엑슨모빌과 같은 많은 국제 석유 회사들이 이 나라로 돌아왔다. 제재 해제 후 항공 교통량이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2005년에는 연간 항공 여행객이 150만 명에 달했다. 리비아는 엄격한 비자 요건 때문에 오랫동안 서양 관광객들이 방문하기 어려운 나라로 악명 높았다.
2007년, 무아마르 카다피의 둘째 아들인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는 키레네 지역에 관광을 유치하고 그리스 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녹색 개발 프로젝트인 '녹색 산 지속 가능한 개발 지역'에 참여했다. 2011년 8월, 리비아의 사회 기반 시설을 재건하는 데 최소 10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되었다. NTC에 따르면, 2011년 전쟁 이전에도 리비아의 사회 기반 시설은 카다피 행정부의 "완전한 방치"로 인해 열악한 상태였다. 2012년 10월까지 경제는 2011년 분쟁에서 회복되어 석유 생산량이 거의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다. 전쟁 전 석유 생산량은 하루 160만 배럴 이상이었다. 2012년 10월까지 평균 석유 생산량은 하루 140만 배럴을 넘어섰다. 생산 재개는 토탈에너지스, 에니, 렙솔, 빈터샬, 옥시덴탈 페트롤리엄과 같은 주요 서방 기업들의 신속한 복귀 덕분에 가능했다. 2016년, 한 회사는 내년에 하루 90만 배럴을 목표로 한다고 발표했다. 석유 생산량은 4년간의 전쟁으로 하루 160만 배럴에서 90만 배럴로 감소했다.
대수로 공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관개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리비아 남부의 누비아 사암 대수층에서 화석수를 끌어와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포함한 인구 밀집 지역인 리비아 북부 지중해 연안 도시로 공급하는 파이프라인 시스템을 활용한다. 이 물은 리비아에서 사용되는 모든 담수의 70%를 제공한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지속된 제2차 리비아 내전 동안 수자원 기반 시설은 방치와 간헐적인 고장을 겪었다. 2017년까지 리비아 인구의 60%가 영양실조 상태였다. 그 이후로 총인구 710만 명 중 130만 명이 긴급 인도적 지원을 기다리고 있다.
2024년 3월, 리비아는 사업 개발을 적극적으로 촉진하고 국내외 투자를 장려하고 있다. 이 전략적 계획은 경제 기반을 다각화하여 리비아의 장기적인 경제 안정과 번영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재생 에너지, 에너지 효율성, 지속 가능한 농업, 생태 관광과 같은 녹색 산업을 수용하면 다양한 부문에서 새로운 고용 전망을 창출하여 특히 청년층의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6.1. 석유 산업과 자원
리비아 경제의 핵심은 석유 및 천연가스 산업이다.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확인된 석유 매장량(약 480억 배럴 추정)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10위권의 석유 매장국이다. 주로 경질 저유황 원유를 생산하여 국제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천연가스 매장량 또한 상당하며 (약 1조 5천억 입방미터 추정), 이는 에너지 수출 다변화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석유 산업은 국영석유공사(NOC, National Oil Corporation)가 주도하며, 다수의 국제 석유 회사(IOCs)들이 생산 공유 협정(EPSA) 등을 통해 탐사 및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주요 유전 지대는 시르테 분지, 무르주크 분지, 가다메스 분지 등 내륙과 해상에 분포한다. 생산된 원유는 주로 유럽 시장으로 수출되며, 리비아는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회원국으로서 국제 유가 및 생산량 조절에 참여하고 있다.
2011년 내전 이전 리비아의 석유 생산량은 하루 약 160만 배럴에 달했으나, 내전과 이후 정치적 불안정, 무장 세력의 석유 시설 점거 및 파괴, 파업 등으로 인해 생산량은 급격한 변동을 겪어왔다. 한때 생산량이 하루 수십만 배럴 수준으로 급감하기도 했으나, 정세 안정 시기에는 다시 100만 배럴 이상으로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적 불안정은 석유 생산 및 수출에 가장 큰 위협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석유 및 가스 수입은 리비아 정부 재정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며, 국가 예산과 사회 복지 지출의 주요 재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석유 의존도는 국제 유가 변동에 취약한 경제 구조를 만들었으며, 경제 다변화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석유 외 주요 자원으로는 석고가 있으며, 그 외 철광석, 칼륨, 마그네슘 등의 광물 자원도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개발은 미미한 수준이다.
6.2. 농업과 대수로 공사

리비아의 농업은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 탓에 매우 제한적이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전체 국토 면적의 약 1-2%에 불과하며, 주로 지중해 연안 지역과 일부 오아시스에 집중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밀, 보리, 올리브, 대추야자, 감귤류, 채소, 땅콩 등이 있다. 목축업도 이루어져 양, 염소, 낙타 등을 사육한다.
만성적인 물 부족은 리비아 농업의 가장 큰 제약 요인이다. 연 강수량이 적고 불규칙하여 대부분의 농업은 관개에 의존한다. 이러한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다피 정권 시절 야심 차게 추진된 사업이 바로 대수로 공사(Great Man-Made River Project)이다. 이 프로젝트는 1984년에 착공되어 수십 년간 진행되었으며, 남부 사하라 사막 지하에 매장된 막대한 양의 화석수(고대 지하수)를 북부 해안의 도시 지역과 농경지로 끌어오는 거대한 파이프라인 시스템이다. 대수로 공사는 리비아의 식수 공급과 농업용수 확보에 크게 기여하여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기도 했으나, 막대한 건설 및 유지보수 비용, 화석수의 고갈 가능성, 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논란도 지속되어 왔다. 내전 이후에는 관리 부실과 시설 파괴로 인해 일부 구간에서 운영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리비아는 식량 자급률이 매우 낮아 소비되는 곡물의 약 9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는 식량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농업 생산량 증대 정책을 추진해왔으나, 자연환경의 한계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1958년 석유 발견 이전에는 농업이 국가 수입의 주요 원천이었으나, 석유 산업 발전 이후 농업 부문의 비중은 급격히 감소하여 GDP의 5% 미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6.3. 경제 구조와 과제
리비아 경제는 전형적인 석유 의존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석유 및 천연가스 부문이 GDP의 절반 이상, 수출 수입의 거의 전부(90% 이상)를 차지하며, 정부 재정의 주요 원천이다. 이러한 구조는 국제 유가 변동에 매우 취약하며,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주요 경제적 문제점 및 과제:
1. 석유 의존도 심화 및 경제 다변화 부족: 석유 외 산업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 제조업, 농업, 관광업 등 다른 산업 부문의 발전이 더디며, 경제 다변화 노력이 시급하다.
2. 높은 실업률, 특히 청년 실업: 공공 부문이 과도하게 비대하며, 민간 부문의 일자리 창출 능력은 미흡하다. 이는 높은 청년 실업률로 이어져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된다.
3. 인프라 부족 및 노후화: 교통, 통신, 전력 등 사회 기반 시설이 전반적으로 부족하고, 내전으로 인해 많은 시설이 파괴되거나 노후화되었다. 특히 전력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
4. 정치적 불안정 및 안보 위협: 지속되는 정치적 혼란과 무장 세력의 활동은 경제 활동을 위축시키고 외국인 투자를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석유 시설에 대한 공격이나 봉쇄는 국가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5. 제도적 취약성 및 거버넌스 문제: 법치주의 확립 미흡, 부정부패, 비효율적인 행정 시스템 등은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구조적 문제이다.
6. 민간 부문 육성 미흡: 국가 주도 경제의 영향으로 민간 기업의 경쟁력이 약하고, 창업 및 기업 활동을 위한 환경이 충분히 조성되지 못했다.
7. 해외 자산 동결 및 관리 문제: 카다피 정권 시절 축적된 막대한 해외 자산의 일부가 동결되거나, 정권 교체 이후 관리 및 회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전 이후 리비아는 경제 재건이라는 막중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 회복, 안보 강화, 제도 개혁, 경제 다변화, 민간 부문 활성화, 사회 기반 시설 확충 등 다방면에 걸친 노력이 필요하다. 국제 사회의 지원과 협력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6.4. 관광
리비아는 풍부한 역사 유적과 독특한 자연 경관을 보유하고 있어 관광 산업 발전 잠재력이 큰 나라로 평가받는다.
주요 관광 자원:
- 고대 로마 유적: 렙티스 마그나, 사브라타, 키레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표적인 로마 시대 유적지로, 잘 보존된 극장, 신전, 목욕탕, 개선문 등을 통해 고대 로마 문명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렙티스 마그나는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 고대 그리스 유적: 키레네는 고대 그리스의 주요 식민 도시 중 하나였으며, 아폴로 신전, 제우스 신전 등 그리스 시대의 유적이 남아있다.
- 사하라 사막 관광: 광활한 리비아 사막은 독특한 모래 언덕, 기암괴석, 오아시스 등을 탐험하는 사막 투어의 매력을 제공한다. 타드라르트 아카쿠스 암각화 유적지(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는 선사 시대 인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 가다메스 구시가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사막의 진주"라 불리는 전통적인 오아시스 도시이다. 독특한 미로형 골목과 흙벽돌 건축물이 특징이다.
- 지중해 연안: 아름다운 해변과 해안 경관도 잠재적인 관광 자원이다.
관광 산업 발전 가능성 및 제약 요인:
리비아는 이러한 풍부한 관광 자원을 바탕으로 관광 산업을 육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카다피 정권 말기에는 서방과의 관계 개선 이후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내전 이후 지속된 정치적 불안정과 치안 악화는 리비아 관광 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현재 리비아 관광 산업의 주요 제약 요인은 다음과 같다:
- 정치적 불안정 및 치안 부재: 가장 큰 걸림돌로, 여행객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
- 미흡한 관광 인프라: 숙박 시설, 교통망, 관광 안내 시스템 등이 국제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 국제 사회의 여행 경보: 다수의 국가가 자국민에게 리비아 여행을 금지하거나 자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 비자 발급의 어려움: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비자 발급 절차가 까다롭고 제한적이다.
- 문화유산 관리 부족: 내전과 혼란 속에서 일부 유적지가 손상되거나 약탈당하는 사례가 발생했으며, 체계적인 관리와 보존 노력이 미흡하다.
정치적 안정이 회복되고 관광 인프라가 개선된다면 리비아는 풍부한 문화유산과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매력적인 관광 목적지로 부상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관광 산업 발전보다는 국가 안정과 재건이 우선적인 과제로 남아 있다.
7. 사회
리비아 사회는 아랍 문화와 이슬람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부족 중심의 사회 구조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랜 독재와 내전,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불안정은 리비아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7.1. 인구 구성
2024년 기준 리비아의 총인구는 약 7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광활한 국토 면적에 비해 인구 밀도는 매우 낮은 편으로, 제곱킬로미터당 약 3~4명 수준이다. 인구의 약 85~90%가 지중해 연안의 좁은 지역, 특히 트리폴리, 벵가지, 미스라타 등 주요 도시에 집중되어 거주하고 있다. 도시화율은 매우 높아 약 8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비아는 상대적으로 젊은 인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15세 미만 인구가 전체 인구의 약 27.7%를 차지한다 (2023년 추정). 평균 수명은 2023년 기준 약 73.5세 (남성 71세, 여성 76세) 정도로 추정되나, 내전 이후 보건 시스템 악화로 인해 정확한 통계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
출생률은 과거에 비해 다소 감소했으나 여전히 높은 편이며, 인구 증가율도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1964년 약 154만 명이었던 인구는 1984년 360만 명으로 증가했고, 현재에 이르렀다.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상당수의 국내 실향민(IDP)이 발생했으며, 많은 리비아인들이 해외로 피난하거나 이주했다. 또한, 과거에는 이집트, 수단,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리비아에 거주했으나, 내전 이후 그 수가 크게 감소했다. 국제이주기구(IOM)는 2023년 기준 약 70만 명 이상의 외국인 노동자가 리비아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0%에 해당한다.
가족 중심의 문화가 강하며, 대가족 형태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주거 형태는 주로 아파트나 단독 주택이며, 소득 수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7.2. 민족
리비아의 주민 대다수는 아랍인이거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이다. 이들은 주로 7세기 이후 아랍인의 대규모 이주 과정에서 정착한 바누 술라임, 바누 힐랄과 같은 베두인 아랍 부족의 후예로 여겨진다. 아랍인이 전체 인구의 약 92%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아마지그인)은 리비아의 주요 소수 민족으로, 인구의 약 5~10%(약 60만 명)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주로 북서부의 나푸사 산맥, 주와라, 가다메스 등지와 남부의 오아시스 지역에 거주하며, 고유한 언어(타마지트어)와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카다피 정권 시절에는 베르베르 언어와 문화가 억압받았으나, 2011년 이후 그들의 권리 신장을 위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남부 지역, 특히 사브하, 쿠프라, 가트, 무르주크 등지에는 또 다른 소수 민족인 투아레그족과 투부족이 거주한다.
- 투아레그족은 사하라 사막을 무대로 유목 생활을 해온 베르베르계 민족으로, 독특한 푸른색 복장과 타마셰크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투부족은 차드 북부와 니제르 동부에도 걸쳐 분포하는 흑인계 민족으로, 주로 목축업에 종사한다.
오스만 제국 통치 기간 동안 정착한 일부 터키인의 후예들도 존재하며, 이들은 '쿨루글리스(Kouloughlis)'라고 불리며 주로 도시 지역에 거주한다.
리비아는 세계에서 부족주의(Tribalism) 성향이 가장 강한 국가 중 하나로, 약 140여 개의 부족과 씨족이 존재한다. 이러한 부족 구조는 리비아의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특히 내전 이후에는 각 부족이 자체 민병대를 조직하고 특정 정치 세력과 연대하는 등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했다.
과거에는 상당수의 이탈리아인 정착민이 거주했으나, 1947년 독립 이후와 1970년 카다피 집권 이후 대부분 본국으로 귀환했다. 2000년대에 소수의 이탈리아인이 돌아오기도 했다.
7.3. 언어
리비아의 공식 언어는 아랍어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주로 리비아 아랍어 방언이 사용되며, 이는 표준 아랍어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서부 지역 방언은 튀니지 아랍어의 영향을, 동부 지역 방언은 이집트 아랍어의 영향을 받은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
베르베르어파 언어들도 소수 민족에 의해 사용된다. 대표적인 베르베르어 계통 언어로는 나푸사 산맥과 주와라 등지에서 사용되는 나푸시어, 가다메스 오아시스에서 사용되는 가다메스어, 투아레그족이 사용하는 타마셰크어, 아우질라 오아시스에서 사용되는 아우질라어, 소크나 오아시스에서 사용되는 소크나어 등이 있다. 카다피 정권 시절에는 베르베르어 사용이 억압되었으나, 2011년 이후 베르베르 문화와 언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리비아 아마지그 고등평의회(LAHC)는 아마지그인(베르베르인) 거주 지역에서 타마지트어(베르베르어)를 공식 언어로 선언하기도 했다.
과거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이탈리아어가 상업 분야나 일부 노년층 사이에서 사용되기도 하며, 소수의 이탈리아계 주민들이 여전히 이탈리아어를 사용한다.
영어는 주요 도시의 교육받은 계층과 비즈니스 분야에서 널리 통용되는 외국어이다. 카다피 정권 시절에는 외국어 교육이 제한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영어 교육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그 외에도 소수의 이주민 공동체에서는 각자의 모국어가 사용될 수 있다.
7.4. 종교

리비아의 국교는 이슬람교이며, 인구의 약 97%가 무슬림이다. 이들 대부분은 이슬람의 수니파에 속한다. 특히 말리키 학파가 우세하다. 소수의 이바디파 무슬림도 존재한다.
1930년대 이전까지 리비아의 주요 이슬람 운동은 사누시 운동(Senussi)이었다. 이는 사막 생활에 적응한 종교 부흥 운동으로, 자와야(수도원)는 트리폴리타니아와 페잔에서도 발견되었지만 사누시의 영향력은 키레나이카에서 가장 강력했다. 이 지역을 불안과 혼란에서 구출한 사누시 운동은 키레나이카 부족민들에게 종교적 유대감과 통일성, 목적의식을 부여했다. 이 이슬람 운동은 이탈리아-투르크 전쟁 당시 이탈리아의 침공과 이후 카다피 정권에 의해 결국 파괴되었다. 카다피는 자신이 독실한 무슬림이라고 주장했으며, 그의 정부는 이슬람 기관을 지원하고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2011년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극보수적인 이슬람 계파들이 일부 지역에서 다시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역사적으로 지하디스트 사상의 온상이었던 동부 데르나는 2014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 연계 무장세력의 통제하에 들어가기도 했다. 제2차 리비아 내전의 결과로 시르테와 벵가지 등 다른 지역으로도 지하디스트 세력이 확산되었다.
소수의 기독교 공동체도 존재하며, 주로 외국인들로 구성된다. 콥트 정교회는 이집트의 주요 기독교 교파로, 리비아에서 가장 크고 역사적인 기독교 교파이다. 약 6만 명의 이집트 콥트교도들이 리비아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트리폴리, 벵가지, 미스라타에 콥트 교회가 있다. 로마 가톨릭교 신자도 약 4만 명으로 추산되며, 트리폴리(이탈리아인 공동체)와 벵가지(몰타인 공동체)에 각각 주교가 있다. 트리폴리에는 아프리카 이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성공회 공동체도 있으며, 이집트 성공회 교구에 속해 있다. 선교 행위는 불법으로 간주되어 기독교 선교사 혐의로 체포된 사례도 있다. 기독교인들은 일부 지역에서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의 폭력 위협에 직면하기도 했으며, 2015년 2월 ISIL이 콥트 기독교인들을 집단 참수하는 영상이 공개되어 충격을 주었다. 국제 기독교 선교단체 오픈도어선교회의 2022년 세계 감시 목록에서 리비아는 기독교인이 가장 극심한 박해를 받는 50개국 중 4위를 기록했다.
리비아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 중 하나의 본거지였으며, 그 역사는 최소 기원전 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2년 이탈리아 파시스트 당국은 트리폴리 남쪽에 유대인을 위한 강제 노동 수용소를 설치했는데, 여기에는 지아도(약 3,000명의 유대인), 가리안, 제렌, 티그린나가 포함되었다. 지아도에서는 약 500명의 유대인이 허약, 기아, 질병으로 사망했다. 1942년 강제 수용소에 있지 않은 유대인들은 경제 활동이 심하게 제한되었고 18세에서 45세 사이의 모든 남성은 강제 노동에 징집되었다. 1942년 8월 트리폴리타니아의 유대인들은 시디 아자즈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11월 이후 3년 동안 일련의 포그롬으로 14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1948년까지 약 38,000명의 유대인이 리비아에 남아 있었다. 1951년 리비아 독립 후 대부분의 유대인 공동체는 이주했다.
7.5. 교육

리비아의 인구 중 학생은 약 170만 명이며, 이 중 27만 명 이상이 고등 교육을 받고 있다. 리비아의 기초 교육은 모든 시민에게 무료이며, 중등 교육까지 의무 교육이다. 2010년 성인 식자율은 89.2%였다.
1951년 리비아 독립 후, 첫 번째 대학인 리비아 대학교가 왕명으로 벵가지에 설립되었다. 1975-76학년도 대학생 수는 13,418명으로 추산되었다. 2004년 현재 이 숫자는 2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으며, 추가로 7만 명이 고등 기술 및 직업 부문에 등록되어 있다. 고등 교육 부문 학생 수의 급격한 증가는 고등 교육 기관 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1975년 이후 공립 대학 수는 2개에서 12개로 증가했으며, 1980년 도입된 이후 고등 기술 및 직업 교육 기관 수는 84개로 증가했다. 2007년부터는 리비아 국제 의과 대학교와 같은 일부 새로운 사립 대학이 설립되었다. 2011년 이전에는 소수의 사립 기관이 인가를 받았지만, 리비아 고등 교육의 대부분은 항상 공공 예산으로 재정을 지원받았다. 1998년 교육 예산 배정액은 리비아 국가 예산의 38.2%를 차지했다.
카다피 정권 시절에는 6세부터 15세까지 초등 및 전기 중등 교육이 무상 의무 교육이었으며, 이후 3년간의 후기 중등 교육을 거쳐 고등 교육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의무 교육뿐만 아니라 국공립 학교의 학비는 무상으로 제공되어 풍부한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한 복지 국가 체제를 구축했다.
주요 고등 교육 기관으로는 가르유니스 대학교(벵가지, 1955년 리비아 대학교로 설립), 트리폴리 대학교(1957년 리비아 대학교 트리폴리 분교로 설립, 후일 알 파테 대학교로 개칭 후 현재 명칭), 오마르 알무크타르 대학교(알바이다) 등이 있다.
2024년 교육부는 전국 여러 지역의 12개 학교에서 수업 시간을 연장하는 종일제 학교 프로젝트(Full-Day School Project)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는 3,300명의 초등학생에게 연간 800시간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7.6. 보건
2010년 리비아의 의료비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3.88%를 차지했다. 2009년 기준, 인구 10,000명당 의사 수는 18.71명, 간호사 수는 66.95명이었다. 2011년 출생 시 기대 수명은 74.95세였으며, 남성은 72.44세, 여성은 77.59세였다.
2023년 리비아 보건부는 집단 클리닉과 보건 센터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 2023-2028년 국가 1차 의료 전략을 발표했다. 각 시민에게 고유한 건강 번호를 부여하여 의료 기록 접근을 용이하게 할 예정이다. 다니엘 폭풍 이전,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데르나 및 그 주변 지역에서 약 6만 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폭풍 이후 데르나와 리비아 동부의 많은 병원과 1차 보건 시설이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리비아의 2024년 세계 기아 지수(GHI) 점수는 19.2점으로, 이는 중간 수준의 기아 상태를 나타낸다. 리비아는 127개국 중 83위를 기록했다.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은 리비아의 보건 의료 시스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의료 시설 파괴, 의료 인력 부족, 의약품 및 의료 장비 공급 불안정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의료 서비스 접근성이 크게 저하되었다. 특히 분쟁 지역과 외곽 지역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전염병 관리 시스템도 약화되어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현재 리비아는 붕괴된 보건 의료 시스템을 재건하고 의료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남아 있다.
8. 문화



리비아의 문화는 아랍 문화와 이슬람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베두인 유목민 문화와 정주형 베르베르 문화의 영향도 혼재되어 있다. 많은 아랍어 사용 리비아인들은 자신들을 광범위한 아랍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며, 이는 20세기 중반 범아랍주의 확산과 함께 강화되었다. 카다피 정권 하에서는 아랍어가 유일한 공식 언어로 지정되었고, 토착 베르베르어의 교육과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영어 등 외국어 교육도 제한되어 여러 세대의 리비아인들이 영어 이해에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구어체 아랍어 방언과 베르베르어에는 이탈리아 식민 통치 시기에 유입된 이탈리아어 단어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리비아인들은 과거 유목 생활을 하던 베두인 아랍어 사용자와 정착 생활을 하던 베르베르 부족의 전통에서 유산을 물려받았다. 대부분의 리비아인들은 부족 또는 정복 기반 유산에서 비롯된 특정 가문 이름과 자신을 연관시킨다.
"나눔의 본성"(아랍어: الاحسان, 이흐산; 베르베르어: ⴰⵏⴰⴽⴽⴰⴼ, 아나카프)을 반영하듯, 리비아인들의 환대 정신과 함께 최근 리비아는 2013년 세계 기부 지수에서 상위 20위권에 들었다. CAF에 따르면, 일반적인 한 달 동안 거의 전체 리비아인의 3/4(72%)가 모르는 사람을 도왔으며, 이는 조사 대상 135개국 중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카다피 정권 하 수십 년간의 문화적 억압과 독재 정권 하의 사회 기반 시설 개발 부족으로 인해 극장이나 미술관은 거의 없다. 수년 동안 공공 극장은 없었으며, 외국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도 극히 드물었다. 민속 문화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국내외의 잦은 축제에서 악단들이 음악과 춤을 공연한다.
많은 리비아 텔레비전 방송국은 정치 평론, 이슬람 주제, 문화 현상에 중점을 둔다. 여러 TV 방송국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전통 리비아 음악을 방영한다. 투아레그 음악과 춤은 가다메스와 남부 지역에서 인기가 있다. 리비아 텔레비전 방송은 대부분 아랍어로 프로그램을 방송하지만, 보통 영어와 프랑스어 프로그램을 위한 시간대를 마련한다. 1996년 언론인보호위원회의 분석에 따르면, 리비아의 언론은 독재 기간 동안 아랍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2012년 현재, 구체제의 검열 붕괴와 "자유 언론"의 시작으로 수백 개의 TV 방송국이 방송을 시작했다.
많은 리비아인들이 해변을 자주 찾으며, 리비아의 고고학 유적지, 특히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고고학 유적지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렙티스 마그나를 방문한다. 도시 간 가장 일반적인 대중교통 수단은 버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로 여행한다. 리비아에는 철도 서비스가 없지만, 가까운 미래에 건설될 계획이다.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는 많은 박물관과 기록 보관소가 있다. 여기에는 정부 도서관, 민족학 박물관, 고고학 박물관, 국립 기록 보관소, 금석학 박물관, 이슬람 박물관이 포함된다. 수도 해안 근처 도심에 위치하며 유네스코와 협의하여 건설된 붉은 성 박물관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8.1. 전통과 생활 양식
리비아의 전통과 생활 양식은 유목 생활을 해온 베두인 아랍 문화와 산악 및 오아시스 지역에 정주해온 베르베르(아마지그) 문화가 혼합된 형태를 띤다. 가족은 리비아 사회의 핵심 단위이며, 대가족 중심의 생활이 보편적이다. 가족 구성원 간의 유대감이 강하고, 연장자에 대한 존경심이 깊다. 결혼은 중요한 가족 행사로, 전통적인 의식과 절차에 따라 성대하게 치러진다.
환대(hospitality)는 리비아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전통이며, 차나 음식을 나누는 것은 일상적인 교류의 중요한 부분이다. 공동체 의식 또한 강하여,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정신이 남아 있다.
전통적인 생활 방식은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사막 지역의 베두인족은 낙타나 양을 치며 이동하는 유목 생활을 해왔으나, 현대에 와서는 점차 정주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인 천막 생활, 음식, 의복, 구전 문학 등은 여전히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나푸사 산맥이나 가다메스 등지의 베르베르인들은 고유의 언어와 관습을 지키며 독특한 공동체 문화를 유지해왔다. 그들의 전통 가옥 건축 양식이나 수공예품 등은 중요한 문화적 특징이다.
이슬람교는 리비아인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루 다섯 번의 기도, 라마단 기간의 단식, 종교적 축제 등은 중요한 생활의 일부이다. 전통적인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기반한 가치관이 사회 규범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의복에 있어서 남성들은 전통적으로 '자르드(jarid)'라 불리는 넓은 천을 몸에 두르거나, '갈라베야(gallabeyya)'와 유사한 긴 튜닉을 입는다. 여성들은 외출 시 몸 전체를 가리는 전통 의상인 '하이크(haik)'나 '아바야(abaya)'를 착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히잡으로 머리를 가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대에 와서는 도시화와 세계화의 영향으로 서구적인 생활 양식이 많이 유입되었으나, 전통적인 가치관과 관습은 여전히 리비아 사회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8.2. 음식


리비아 음식은 이탈리아, 베두인, 전통 아랍 요리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파스타는 리비아 서부 지역의 주식이며, 동부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쌀이 주식이다.
일반적인 리비아 음식에는 붉은 토마토 소스 기반 파스타 요리의 여러 변형(이탈리아의 아라비아타 소스와 유사)이 포함된다. 쌀은 보통 양고기나 닭고기(일반적으로 스튜, 튀김, 구이 또는 소스에 삶음)와 함께 제공된다. 쿠스쿠스는 붉은 토마토 소스와 고기(때로는 주키니와 병아리콩 포함)를 끓이는 동안 그 위에서 쪄서 조리하며, 일반적으로 오이 조각, 상추, 올리브와 함께 제공된다.
바진(بازين바진아랍어)은 보릿가루로 만들어 붉은 토마토 소스와 함께 제공되는 요리로, 여러 사람이 같은 접시를 손으로 나누어 먹는 것이 관례이다. 이 요리는 전통 결혼식이나 축제에서 흔히 제공된다. 아시다(عصيدة아시다아랍어)는 바진의 달콤한 버전으로, 흰 밀가루로 만들어 꿀, 기버터 또는 버터를 섞어 제공된다. 아시다를 제공하는 또 다른 인기 있는 방법은 럽(신선한 대추야자 시럽)과 올리브 오일을 곁들이는 것이다. 우스반(عصبان우스반아랍어)은 동물의 내장을 꿰매고 쌀과 채소를 채워 토마토 기반 수프에 끓이거나 찐 요리이다. 슈르바(شوربة슈르바아랍어)는 붉은 토마토 소스 기반 수프로, 보통 작은 파스타 알갱이와 함께 제공된다.
리비아인들이 매우 흔하게 먹는 간식은 '쿱스 비툰'(خبز بالتون쿱즈 빌톤아랍어, 문자 그대로 "참치 빵")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통 하리사(칠리 소스)와 올리브 오일을 섞은 참치를 채운 구운 바게트나 피타 빵 형태로 제공된다. 많은 간식 판매상들이 이 샌드위치를 준비하며 리비아 전역에서 찾을 수 있다. 리비아 식당에서는 세계 각국의 요리를 제공하거나 양고기, 닭고기, 채소 스튜, 감자, 마카로니와 같은 간단한 음식을 제공할 수 있다. 사회 기반 시설의 심각한 부족으로 인해 많은 저개발 지역과 작은 마을에는 식당이 없으며 대신 식품점이 식품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일 수 있다. 주류 소비는 불법이다.
전통 리비아 음식의 네 가지 주요 재료는 올리브(와 올리브 오일), 대추야자, 곡물, 우유이다. 곡물은 굽고, 갈고, 체로 쳐서 빵, 케이크, 수프, 바진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대추야자는 수확하여 말린 후 그대로 먹거나, 시럽으로 만들거나, 살짝 튀겨 비시사와 우유와 함께 먹는다. 식사 후 리비아인들은 종종 홍차를 마신다. 이는 보통 두 번째 잔(두 번째 홍차 잔)을 위해 반복되며, 세 번째 홍차 라운드에서는 '샤이 빌루즈'(같은 잔에 차와 섞음)로 알려진 구운 땅콩이나 구운 아몬드와 함께 제공된다.
8.3. 예술과 미디어
카다피 정권(1969-2011) 시기 리비아의 문화 예술 활동은 엄격한 통제와 검열 하에 놓여 있었다. 정권의 이념인 자마히리야 사상과 녹색서의 원칙에 부합하는 내용만이 장려되었으며, 비판적이거나 서구적인 예술은 억압받았다. 이로 인해 창작 활동이 위축되고 문화적 다양성이 크게 제한되었다. 공공 극장이나 미술관은 거의 없었고, 영화 또한 외국 영화 상영이 극히 드물었다.
전통 민속 예술, 특히 음악과 춤은 정부 주도의 축제나 행사를 통해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베두인 음악, 투아레그 음악, 안달루시아 음악의 영향을 받은 전통 음악들이 있으며, 다양한 타악기와 현악기가 사용된다.
2011년 내전 이후 카다피 정권이 붕괴하면서 문화 예술 분야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검열이 완화되면서 이전에는 금기시되었던 주제를 다루는 예술 작품들이 등장하고, 젊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창작 활동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적 혼란이 지속되면서 예술 활동을 위한 안정적인 환경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으며, 재정 지원 또한 부족한 실정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영향으로 문화 예술 활동이 다시 위축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미디어 환경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카다피 정권 시절에는 모든 언론 매체가 국가의 엄격한 통제 하에 있었으며, 정부의 선전 도구 역할을 했다. 1996년 언론인보호위원회는 리비아의 언론을 아랍 세계에서 가장 통제된 언론으로 평가했다. 내전 이후에는 수많은 민간 텔레비전 방송국과 라디오 방송국, 신문, 온라인 매체들이 생겨나면서 미디어 환경이 급격하게 다원화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적 양극화와 허위 정보 확산, 언론인에 대한 위협 등 새로운 문제점들도 나타나고 있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로, 정치 토론 프로그램, 뉴스, 종교 프로그램, 전통 음악 프로그램 등이 방송된다. 아랍어가 주요 방송 언어이지만, 영어와 프랑스어 프로그램 시간대도 일부 마련되어 있다.
8.4. 스포츠
리비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단연 축구이다. 리비아는 198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개최했으며, 당시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가나에 승부차기 끝에 7-6으로 패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것이 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대 최고 성적이다. 이후 2014년 아프리카 네이션스 챔피언십(자국 리그 선수들만 참가하는 대회)에서는 가나를 결승에서 꺾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FIFA 월드컵 본선에는 아직 진출한 경험이 없으나, 축구에 대한 국민적 열정은 매우 높으며, 축구 수준 향상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리비아 프리미어리그라는 자국 프로 축구 리그가 운영되고 있다.
승마 또한 리비아에서 인기 있는 전통 스포츠 중 하나이다. 특히 특별한 행사나 휴일에는 승마 경기가 열리는 전통이 있다.
그 외에도 농구, 배구, 핸드볼, 육상 등 다양한 스포츠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리비아는 여러 차례 하계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한 바 있다. 그러나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스포츠 시설 관리나 선수 육성 시스템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8.5. 세계유산
리비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총 5건의 문화유산이 있다. 이들 유산은 리비아의 풍부한 역사와 다양한 문명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산이지만, 2011년 내전 이후 정치적 불안정과 치안 악화로 인해 모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되어 보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 렙티스 마그나 고고 유적 (Leptis Magna Archaeological Site): 1982년 등재.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로마의 주요 도시 유적으로,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잘 보존된 극장, 개선문, 목욕탕, 바실리카, 시장 등이 남아 있어 "지중해의 로마"라고 불릴 만큼 웅장함을 자랑한다.

# 사브라타 고고 유적 (Sabratha Archaeological Site): 1982년 등재. 고대 페니키아의 교역항으로 시작하여 로마 시대에 번영했던 도시 유적이다. 특히 3단 구조의 화려한 무대 배경을 가진 로마 극장이 유명하며, 신전, 바실리카, 모자이크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 키레네 고고 유적 (Cyrene Archaeological Site): 1982년 등재. 고대 그리스인들이 북아프리카에 건설한 가장 중요한 식민 도시 중 하나이다. 아폴로 신전, 제우스 신전, 아고라, 네크로폴리스 등 방대한 규모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 타드라르트 아카쿠스 암각화 유적 (Rock-Art Sites of Tadrart Acacus): 1985년 등재. 리비아 남서부 사하라 사막에 위치한 산악 지대로, 기원전 12,000년부터 서기 100년까지 수천 년에 걸쳐 그려진 수천 점의 암각화와 암채화가 발견되었다. 기린, 코끼리, 타조 등 현재는 사라진 동물들과 인간의 생활상을 묘사하고 있어 선사 시대의 자연환경과 문화 변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가다메스 구시가지 (Old Town of Ghadames): 1986년 등재. 사하라 사막의 중요한 오아시스 도시로, "사막의 진주"라고도 불린다. 전통적인 흙벽돌 가옥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독특한 도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사막 기후에 적응한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준다. 주민들의 생활 방식과 사회 구조 또한 독특한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