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에콰도르 공화국은 남아메리카 북서부에 위치한 나라로, 북쪽으로는 콜롬비아, 동쪽과 남쪽으로는 페루와 국경을 접하며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면해 있다. 본토에서 약 1000 km 떨어진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를 영토로 포함한다. 국명 '에콰도르'는 스페인어로 '적도'를 의미하며, 이는 국가가 적도상에 위치한 데서 유래했다. 수도는 키토이며 최대 도시는 과야킬이다.
에콰도르는 잉카 제국 이전 다양한 원주민 문화가 발달했던 지역이었으나, 15세기 잉카 제국에 편입되었고, 16세기에는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820년 그란콜롬비아의 일부로 독립하였고, 1830년 독자적인 국가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에콰도르는 다민족 국가의 특징을 지니며,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메스티소 외에도 원주민, 유럽계, 아프리카계 등 다양한 인종이 공존한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지만, 케추아어와 슈아르어를 포함한 13개의 원주민 언어도 공인되어 사용된다.
정치적으로 에콰도르는 대통령 중심제의 대의 민주주의 공화국이며,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선거 관리 기구, 투명성 및 사회 통제 기구의 5권 분립 체제를 갖추고 있다. 경제는 주로 석유와 농산물 수출에 의존하는 개발도상국형 구조를 보인다. 에콰도르는 유엔, 미주 기구(OAS), 프로수르, 비동맹 운동의 창립 회원국이다.
에콰도르는 세계적으로 생물 다양성이 매우 풍부한 17개 메가다양성 국가 중 하나로, 특히 갈라파고스 제도는 고유종으로 유명하다. 2008년 개정된 헌법은 세계 최초로 자연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적으로는 전통 음악, 지역 특색을 살린 요리, 인디헤니스모 문학, 키토파 미술 등이 발달했으며,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2. 국명
나라 이름 에콰도르(Ecuador에콰도르스페인어)는 스페인어로 '적도'를 의미한다. 이는 에콰도르 영토가 지구의 적도선 바로 위에 위치한 지리적 특징에서 유래했다. 공식 국명은 에콰도르 공화국(República del Ecuador레푸블리카 델 에콰도르스페인어)이며, 이는 직역하면 '적도 공화국'이라는 뜻이다. 과거 그란콜롬비아의 일부였을 때, 1824년 옛 키토 왕립 아우디엔시아 지역에 설치되었던 '에콰도르 주'에서 파생되었다. 에콰도르의 수도인 키토는 적도에서 남쪽으로 약 40234 m (25 mile) (약 4분의 1 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케추아어로는 Ikwayur이크와유르케추아어 또는 Ikwadur Ripuwlika이크와두르 리푸우리카케추아어라고 하며, 슈아르어로는 Ecuador에콰도르jiv 또는 Ekuatur에쿠아투르jiv, Ekuatur Nunka에쿠아투르 눈카jiv라고 한다. 한자로는 액과다(厄瓜多)로 음차하여 표기하기도 한다.
3. 역사
에콰도르 지역의 역사는 선사 시대의 다양한 원주민 문화에서 시작하여 잉카 제국의 지배, 스페인 식민 통치, 독립과 공화국 수립,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발전해왔다. 이 과정에서 영토 분쟁, 정치적 변혁, 사회 경제적 변화 등 다양한 사건들이 에콰도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1. 선사 시대 및 초기 문명


현재의 에콰도르 지역에는 잉카 제국이 도래하기 전부터 다양한 민족이 정착해 살았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구석기 시대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처음 퍼져나간 것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약 16,500년에서 13,000년 전 사이로 추정된다. 에콰도르에 최초로 도달한 사람들은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에서 육로를 통해 이동했거나 태평양 연안을 따라 배를 타고 왔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집단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지만, 각기 다른 환경에 기반한 유사한 문화권을 형성했다. 해안 지역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 사냥, 채집을 결합했고, 안데스 고산지대 주민들은 정착 농경 생활 방식을 발전시켰으며, 아마존 분지 주민들은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고, 일부는 농업과 수목재배를 병행했다.
에콰도르에서는 해안가의 발디비아 문화와 마찰리야 문화, 현재의 키토 인근의 키투 문화, 그리고 현재의 쿠엥카 인근의 카냐리 문화 등 여러 문명이 발흥했다. 발디비아 문화는 기원전 3500년경부터 기원전 1800년경까지 지속된 초기 형성기 문화로, 정교한 도자기와 초기 농경 사회의 증거를 남겼다. 특히 여성 조각상인 '발디비아의 비너스'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유물로 유명하다. 마찰리야 문화는 발디비아 문화 이후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전 800년경까지 해안 지역에서 번성했으며, 독특한 두개골 변형 풍습과 더욱 발전된 도자기 기술을 특징으로 한다.

안데스 고산지대에서는 생활이 더욱 정착화되면서 부족 집단들이 협력하여 마을을 형성했고, 농업 자원과 동물 사육에 기반한 최초의 국가 형태가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과 지도자들 간의 혼인 동맹을 통해 여러 국가 집단이 연맹체를 형성했다. 카냐리족은 특히 강력한 연맹체를 이루어 잉카의 확장에 저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키투 문화는 훗날 잉카 제국의 북부 중심지가 될 키토 지역의 기반을 닦았다.
3.2. 잉카 제국 시대

15세기 중반, 쿠스코를 중심으로 급격히 팽창하던 잉카 제국(Tawantin Suyu타완틴수유케추아어)의 황제 투팍 잉카 유팡키의 원정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지역에 존재하던 여러 문화들이 정복되어 잉카 제국에 편입되었다. 잉카인들이 도착했을 때, 이 지역의 연맹체들은 매우 발전되어 있어 잉카 제국이 이들을 흡수하는 데 토파 잉카 유팡키와 우아이나 카팍 두 세대의 통치자가 필요했다. 저항이 심했던 연맹체 소속 사람들은 페루, 볼리비아, 북부 아르헨티나 등 먼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반대로 반란을 막기 위해 페루와 볼리비아 출신의 충성스러운 잉카 신민들이 에콰도르로 이주해 왔다. 이리하여 1463년, 에콰도르 고산지대는 잉카 제국의 일부가 되어 같은 언어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잉카인들이 에콰도르 해안 지역과 동부 아마존 정글로 진출했을 때는 환경과 원주민들이 더 적대적임을 알게 되었다. 잉카인들이 이들을 복속시키려 할 때마다 이 원주민들은 내륙으로 후퇴하여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아마존 분지와 에콰도르 태평양 연안으로의 잉카 확장은 저지되었다. 아마존 정글과 에콰도르 해안의 카야파스족 원주민들은 잉카와 스페인의 지배 모두에 저항한 유일한 집단으로, 21세기까지도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잘 유지하고 있다.
스페인인들이 도착하기 전, 잉카 제국은 내전에 휘말려 있었다. 유럽에서 전파된 질병으로 인해 정당한 계승자였던 니난 쿠요치와 황제 우아이나 카팍이 모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두 파벌 사이에 권력 공백이 생겼고 내전으로 이어졌다. 아타우알파가 이끄는 북부 주둔군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쿠스코로 향했고, 그의 형제인 우아스카르와 관련된 왕족을 학살했다. 1532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소규모 스페인 군대가 카하마르카에 도착하여 아타우알파를 함정(카하마르카 전투)으로 유인했다. 피사로는 아타우알파가 방을 금으로 가득 채우겠다는 약속을 지키면 풀어주겠다고 했으나, 형식적인 재판 후 스페인인들은 아타우알파를 교살형으로 처형했다.
3.3. 스페인 식민 시대

16세기 스페인의 에콰도르 정복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새로운 전염병에 직면했다. 유럽인들에게는 풍토병이었던 천연두와 같은 질병은 면역력이 없었던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서 높은 사망률을 초래했다. 동시에 원주민들은 스페인인들을 위한 엔코미엔다 노동 체제에 강제로 편입되었다. 1563년, 키토는 스페인의 실제 아우디엔시아(행정 구역)의 소재지가 되었고, 처음에는 페루 부왕령의 일부였다가 나중에는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원주민들은 토지 상실, 강제 노동(미타 제도), 문화적 동화 압력 등 큰 변화를 겪었다.
1717년 산타페데보고타를 중심으로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이 설립되면서 에콰도르는 이 부왕령에 편입되었으나, 1722년 다시 페루 부왕령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행정적 변화는 지역 통치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1797년 리오밤바 지진은 최대 40,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1801년에서 1802년 사이에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연구되었다.
거의 300년의 스페인 통치 후에도 키토는 여전히 인구 10,000명의 작은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1809년 8월 10일, 키토의 크리오요들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다 (라틴 아메리카 민족들 중 최초). 이들은 후안 피오 몬투파르, 키로가, 살리나스, 그리고 쿠에로 이 카이세도 주교가 이끌었다. 키토의 별명인 "루스 데 아메리카" ("아메리카의 빛")는 독립적인 지방 정부를 확보하려는 선도적 역할에 기반한다. 새 정부는 두 달 이상 지속되지 못했지만, 중요한 파장을 일으켰고 나머지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 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오늘날 8월 10일은 독립 기념일로 기념되며, 국경일이다.
3.4. 독립과 국가 형성

19세기 초, 에콰도르 지역에서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809년 8월 10일 키토에서의 첫 독립 시도는 비록 실패했지만, 독립의 열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20년 10월 9일, 과야킬이 에콰도르 영토 중 처음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며 독립 국가를 선포했고, 이는 에콰도르 해안 대부분 지역의 독립을 촉발했다. 이후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1822년 5월 24일 피친차 전투에서 스페인 왕당파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키토를 포함한 에콰도르 전역의 독립이 확고해졌다. 이 날은 현재 에콰도르의 공식 독립 기념일로 기념된다.
독립 후 에콰도르는 시몬 볼리바르가 주도한 그란콜롬비아 연방(현재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파나마 포함)에 가입했다. 그러나 연방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지역적 이해관계 차이로 인해 1830년 에콰도르는 그란콜롬비아에서 분리 독립하여 공화국을 수립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후안 호세 플로레스가 취임했으나, 초기 에콰도르 정치는 극심한 불안정에 시달렸다. 플로레스 대통령 시기에는 잦은 정변과 내전,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었다. 1832년에는 갈라파고스 제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
3.5. 19세기 정치 변동
독립 이후 에콰도르는 지속적인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통치자들이 빠르게 교체되었으며, 초대 대통령인 베네수엘라 태생의 후안 호세 플로레스는 결국 축출되었다. 그 뒤를 이은 지도자들로는 비센테 로카푸에르테, 호세 호아킨 데 올메도, 호세 마리아 우르비나, 디에고 노보아, 페드로 호세 데 아르테타, 마누엘 데 아스카수비, 그리고 플로레스의 아들인 안토니오 플로레스 히혼 등이 있었다.
이 시기 정치는 주로 보수파와 자유파 간의 격렬한 대립으로 특징지어졌다. 보수파는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유지와 중앙 집권적 통치를 옹호한 반면, 자유파는 정교 분리, 개인의 자유 확대, 지방 분권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대립은 잦은 정변과 내전으로 이어져 국가 발전을 저해했다.
1860년대에는 보수주의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받아 나라를 통합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가톨릭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하며 국가의 근대화를 시도했다. 학교, 군대, 철도 건설 등 인프라 구축에 힘썼으며, 원주민 공유지 보호 정책도 일부 시행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1875년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에도 보수파와 자유파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한편, 1851년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1857년에는 원주민 공물 제도가 폐지되어 법적으로는 원주민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3.6. 자유주의 혁명
1895년, 엘로이 알파로가 이끈 자유주의 혁명은 에콰도르 정치 및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혁명은 19세기 후반 동안 지속된 보수파와 자유파 간의 갈등, 그리고 해안 지역(코스타)의 경제적 성장과 자유주의 사상의 확산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알파로와 자유주의자들은 성직자 계층과 보수적인 지주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주요 개혁 내용으로는 정교 분리 원칙 확립, 교육의 세속화, 시민 결혼 및 이혼 합법화, 종교의 자유 보장 등이 있었다. 또한, 철도 건설(특히 과야킬-키토 철도 완공), 통신망 확충 등 경제 발전에도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보수 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으며, 사회적 갈등도 심화되었다. 알파로는 두 차례 대통령을 역임했으나, 정적들에 의해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혁명의 이념과 개혁은 20세기 초반 에콰도르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자유주의 세력은 1925년 군부의 '훌리오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3.7. 20세기와 영토 분쟁
20세기 초반 에콰도르는 정치적 불안정과 함께 이웃 국가인 페루와의 지속적인 영토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아마존 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둘러싼 양국의 주장은 여러 차례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1941년 발발한 에콰도르-페루 전쟁은 에콰도르에게 큰 상실을 안겨주었다. 페루군은 에콰도르 남부 국경을 넘어와 엘오로주와 로하주 일부를 점령했으며, 과야킬 항구를 봉쇄하여 에콰도르군에 대한 보급을 차단했다. 미국의 중재로 양국은 1942년 리오 의정서에 서명했으나, 에콰도르는 이 의정서에 따라 아마존 지역의 약 20.00 만 km2에 달하는 영토를 페루에 할양해야 했다. 이 영토 상실은 에콰도르 국민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고, 이후 수십 년간 양국 관계의 주요 갈등 요인이 되었다.
1944년에는 군부와 시민들의 봉기 및 시민 파업으로 이어진 '영광스러운 5월 혁명'이 일어나 카를로스 아로요 델 리오 독재 정부를 축출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경기 침체와 민중 불안은 1960년대에 대중주의 정치와 국내 군사 개입의 재현으로 이어졌고, 외국 기업들은 에콰도르 아마존 지역의 석유 자원을 개발했다. 1972년 안데스 횡단 송유관 건설이 완료되면서 에콰도르는 남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석유 수출국이 되었다.
1978년, 키토 시와 갈라파고스 제도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 최초로 등재된 두 곳의 유산이 되었다.
3.7.1. 페루와의 국경 갈등 심화와 해결

리오 의정서에도 불구하고 에콰도르 남부의 외딴 콘도르 산맥 지역의 작은 강을 따라 국경이 정확히 해결되지 않아 에콰도르와 페루 간의 오랜 분쟁이 지속되었다. 이는 양국 간의 충돌로 이어졌는데, 처음에는 1981년 1월-2월에 파키샤 사건으로 알려진 국경 교전이 있었고, 궁극적으로 1995년 1월에는 전면전이 벌어져 에콰도르 군이 페루 항공기와 헬리콥터를 격추하고 페루 보병이 에콰도르 남부로 진군했다. 각국은 세네파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적대 행위의 발발을 상대방에게 비난했다. 에콰도르 대통령 식스토 두란 발렌은 에콰도르 영토 단 1센티미터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에콰도르 내 대중 정서는 페루에 대해 강력한 민족주의 성향을 띠게 되었다. 키토의 벽에는 페루를 "라틴 아메리카의 카인"이라고 칭하는 낙서가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창세기에서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것을 언급한 것이다.
리오 의정서의 보증국(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미국)은 미확정 지역의 국경을 콘도르 산맥선으로 설정하기로 결정했다. 에콰도르는 수십 년간 주장해 온 콘도르 산맥 동쪽 경사면과 세네파 강 상류 서쪽 지역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해야 했지만, 페루는 전쟁의 초점이었던 티윈사(Tiwinza) 에콰도르 기지가 페루 영토 내에 위치했고 에콰도르군이 분쟁 중 점령했던 지역 1 km2의 영토를 주권 없이 영구 임대 형태로 에콰도르에 제공해야 했다.
1998년 10월 26일, 에콰도르와 페루는 브라질리아 평화 협정에 서명하여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고, 서반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영토 분쟁을 사실상 종결지었다. 최종 국경 획정은 1999년 5월 13일에 발효되었고, 다국적 MOMEP(에콰도르 및 페루 군사 감시단) 병력은 1999년 6월 17일에 철수했다.
3.8. 군사 정부 시대 (1972년 ~ 1979년)

1970년대 에콰도르는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군사 정권 시대를 맞이했다. 1972년, "혁명적 민족주의"를 표방한 군사 평의회가 벨라스코 이바라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 쿠데타는 기예르모 로드리게스 장군이 주도하고 해군 사령관 호르헤 케이롤로 G.가 실행했다. 새 대통령은 호세 마리아 벨라스코를 아르헨티나로 추방했다. 로드리게스 정권은 석유 자원의 국유화를 시도하고 농지 개혁을 추진하는 등 일부 개혁 정책을 폈으나, 권위주의적 통치와 경제난으로 인해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는 1976년까지 권력을 유지하다가 다른 군사 정부에 의해 축출되었다.
새로운 군사 평의회는 알프레도 포베다 제독이 이끌었으며, 그는 최고 평의회 의장으로 선언되었다. 최고 평의회에는 기예르모 두란 아르센탈레스 장군과 루이스 핀타도 장군 등 두 명의 다른 구성원이 포함되었다. 시민 사회는 점점 더 민주 선거를 강력히 요구했다. 정부 장관이었던 리슐리외 레보예르 대령은 보통 선거를 통해 헌정 체제로 복귀하는 계획을 제안하고 실행했다. 이 계획은 새롭게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행정부의 직무를 맡을 수 있도록 했다. 이 기간 동안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면서 군사 정부는 점차 민정 이양을 준비하게 되었다.
3.9. 민주주의 회복과 현대 (1979년 ~ 현재)

1979년 새 헌법 하에 4월 29일 선거가 치러졌다. 하이메 롤도스 아길레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에콰도르 역사상 가장 많은 백만 표 이상을 얻었다. 그는 거의 10년간의 민간 및 군사 독재 이후 최초의 헌법상 선출된 대통령으로 8월 10일 취임했다. 1980년 그는 인민세력집중당(Concentración de Fuerzas Populares)에서 탈퇴한 후 '인민, 변화, 민주주의당'(Partido Pueblo, Cambio y Democracia)을 창당했다. 그는 1981년 5월 24일 페루 국경 근처에서 악천후 속에서 공군기가 추락하여 부인과 국방장관 마르코 수비아 마르티네스와 함께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개혁적 의제에 대한 다수의 살해 위협, 조사 중 두 명의 주요 증인이 증언하기 전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점, 그리고 사건에 대한 때때로 모순되는 설명 등을 고려할 때 그가 CIA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믿고 있다. 롤도스는 즉시 오스발도 우르타도 부통령이 계승했다.
1984년 사회기독당의 레온 페브레스 코르데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민주좌파당(Izquierda Democrática, ID)의 로드리고 보르하 세바요스는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달라 부카람(하이메 롤도스의 처남이자 에콰도르 롤도시스타당 창립자)을 결선 투표에서 누르고 승리했다. 그의 정부는 인권 보호 개선에 전념했으며, 특히 에콰도르를 해외 무역에 개방하는 등 일부 개혁을 수행했다. 보르하 정부는 엘로이 알파로의 이름을 딴 소규모 테러 단체 "¡알파로 비베, 카라호!"("알파로는 살아있다, 젠장!")의 해체를 협상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경제 문제로 인해 ID당의 인기가 약화되었고, 야당은 1999년 의회를 장악했다.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95년 에콰도르와 페루 사이에 벌어진 세네파 전쟁이었다. 에콰도르는 애틀랜타에서 열린 1996년 하계 올림픽에서 헤페르손 페레스가 20km 경보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첫 올림픽 메달을 땄다.
에콰도르는 국가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2000년 4월 13일 미국 달러를 국가 통화로 채택했고, 9월 11일에는 에콰도르 수크레를 폐지했다. 이후 미국 달러는 에콰도르의 유일한 공식 통화가 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가 적극적인 유권자층으로 부상하면서 최근 몇 년간 국가의 민주적 불안정성이 가중되었다. 이들은 토지 개혁, 실업률 감소, 사회 서비스 제공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정부의 실패와 지주 엘리트들의 역사적 착취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었다. 그들의 운동은 엘리트와 좌파 운동 모두에 의한 지속적인 불안정 노력과 함께 행정부의 악화로 이어졌다. 2005년 4월 루시오 구티에레스 대통령이 의회에서 축출된 것처럼, 국민과 다른 정부 부처는 대통령에게 거의 정치적 자본을 주지 않았다. 알프레도 팔라시오 부통령이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2006년 에콰도르 총선에서 라파엘 코레아가 대통령직을 얻었다. 2007년 1월,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좌파 정치 지도자들, 즉 그의 미래 동맹자들이 그의 취임식에 참석했다. 2008년 국민투표에서 승인된 새 헌법은 좌파 개혁을 시행했다. 2008년 12월, 코레아는 이전의 부패하고 독재적인 정권에 의해 계약된 가증 부채라는 주장에 근거하여 에콰도르의 국가 부채를 불법으로 선언했다. 그는 국가가 30.00 억 USD 이상의 채권을 불이행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국제 법정에서 채권자들과 싸워 미지불 채권 가격을 60% 이상 낮추는 데 성공했다. 그는 2009년 6월 에콰도르를 미주 볼리바르 동맹에 가입시켰다. 코레아 행정부는 에콰도르의 높은 빈곤율과 실업률을 낮췄다.
코레아의 3연임(2007년~2017년)에 이어 그의 전 부통령이었던 레닌 모레노가 4년간 대통령(2017년~2021년)을 지냈다. 2017년 당선된 후 모레노 정부는 공공 지출 감축, 무역 자유화, 노동법 유연화 등 경제적 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에콰도르는 2018년 8월 좌파 미주 볼리바르 동맹(알바)에서도 탈퇴했다. 생산 개발법은 긴축 정책을 도입하고 이전의 개발 및 재분배 정책을 축소했다. 세금과 관련하여 당국은 사기꾼에 대한 사면을 허용하고 대기업의 법인세 세율 인하 조치를 제안하여 "투자자 복귀 장려"를 목표로 했다. 또한 정부는 원자재 가격 인상 및 외화 송환에 대한 세금 인상 권리를 포기했다. 2018년 10월, 모레노는 코레아의 가까운 동맹이었던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행정부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모레노 하에서 미국과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2019년 6월, 에콰도르는 미군 항공기가 갈라파고스 제도의 공항에서 작전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2020년 2월 그의 워싱턴 방문은 17년 만에 에콰도르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 간의 첫 회담이었다.
2019년 10월 3일, 연료 보조금 종료와 모레노가 채택한 긴축 조치에 반대하는 일련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10월 10일, 시위대가 수도 키토를 점령하여 에콰도르 정부는 일시적으로 과야킬로 이전해야 했다. 정부는 결국 2019년에 키토로 돌아왔다. 2019년 10월 14일, 정부는 연료 보조금을 복원하고 긴축 패키지를 철회하여 거의 2주간의 시위를 끝냈다.

2021년 4월 11일 선거에서 보수적인 전 은행가 기예르모 라소가 52.4%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망명한 전 대통령 코레아의 지지를 받은 좌파 경제학자 안드레스 아라우스(47.6%)를 눌렀다. 라소는 2013년과 2017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했었다. 2021년 5월 24일, 라소가 취임하여 14년 만에 에콰도르 최초의 우파 지도자가 되었다. 라소의 정당인 CREO 운동과 그 동맹인 사회기독당(PSC)은 137석 중 31석만을 얻은 반면, 아라우스의 희망을 위한 연합(UNES)은 49석을 얻어, 라소가 그의 입법 의제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민주좌파당과 원주민 파차쿠틱 정당의 지지가 필요했다.
2021년 10월, 라소는 범죄와 마약 관련 폭력, 특히 국영 교도소 내 경쟁 집단 간의 수많은 유혈 충돌에 대처하기 위해 60일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라소는 범죄 대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헌법 개정을 제안했다. 2023년 2월 국민투표에서 유권자들은 그가 제안한 변경안을 압도적으로 거부하여 라소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켰다.
2023년 10월 15일, 중도 성향의 다니엘 노보아 후보가 조기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후보 루이사 곤살레스를 상대로 52.3%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2023년 11월 23일, 노보아가 취임했다.
2024년 1월, 노보아는 수감 중이던 로스 초네로스 카르텔의 두목 호세 아돌포 마시아스 비야마르("피토"로도 알려짐)의 탈옥과 공영 TV 채널에 대한 무장 공격에 대응하여 조직 범죄에 대한 "내부 무력 충돌"을 선포했다.
4. 정치
에콰도르 국가 체제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선거 관리 기구, 투명성 및 사회 통제 기구 등 5개 부문으로 구성된다. 에콰도르는 4년 임기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 의해 통치된다. 에콰도르 대통령은 키토의 대통령궁인 카론델레트 궁전에서 권한을 행사한다. 현행 헌법은 2007년 선출된 에콰도르 제헌의회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2008년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되었다. 1936년부터 18세에서 65세까지의 모든 문자 해독 가능자에게는 투표가 의무이며, 16세 이상의 다른 모든 시민에게는 선택 사항이다.
4.1. 정부 구조
에콰도르 정부는 대통령 중심 공화제로 운영되며,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삼권 분립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 추가로 선거 관리 기구와 투명성 및 사회 통제 기능 기구가 독립된 권력 기관으로 존재하여 총 5권 분립 체제를 이루고 있다.
4.1.1. 행정부
행정부는 대통령이 이끈다. 대통령은 부통령과 함께하며, 4년 임기(단 한 번만 재선 가능)이다. 국가 원수이자 최고 정부 관리로서, 그는 국가 조정관, 장관, 국무 장관 및 공무원 임명을 포함한 공공 행정을 책임진다. 행정부는 외교 정책을 정의하고, 공화국 총리뿐만 아니라 대사와 영사를 임명하며, 에콰도르 군대, 에콰도르 국가 경찰, 그리고 임명 당국에 대한 최종 권한을 갖는다. 현직 대통령의 부인은 에콰도르의 영부인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4.1.2. 입법부
입법부는 키토 시의 입법궁에 본부를 둔 국민의회에 의해 구현되며, 10개 위원회로 나뉘고 4년 임기로 선출된 13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15명의 전국구 선출 의원, 각 주에서 선출된 2명의 의원, 그리고 최근 전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10만 명 또는 15만 명을 초과하는 부분당 1명의 의원이 있다. 또한, 법령은 지역 및 수도권 지역 의원 선출을 결정한다.
4.1.3. 사법부
에콰도르의 사법부는 주요 기관으로 사법 평의회를 두고 있으며, 국립 사법 재판소, 지방 법원 및 하급 법원도 포함한다. 법적 대표는 사법 평의회에 의해 이루어진다. 국립 사법 재판소는 9년 임기로 선출된 21명의 판사로 구성된다. 판사는 사법 규약에 따라 3년마다 3분의 1씩 갱신된다. 이들은 반대 심의 및 공적에 기초하여 사법 평의회에 의해 선출된다. 사법 제도는 독립적인 검찰청과 공익 변호인 사무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보조 기관은 다음과 같다: 공증인, 법원 경매인 및 법원 수령인.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을 위한 특별 법적 제도가 있다.
4.1.4. 선거 관리 기구
선거 제도는 4년마다 또는 선거 또는 국민투표가 있을 때만 권한을 행사하는 당국에 의해 운영된다. 주요 기능은 선거를 조직하고 통제하며 선거 규칙 위반을 처벌하는 것이다. 주요 기관은 키토 시에 기반을 둔 국가 선거 평의회이며,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의 7명으로 구성되며 완전한 재정 및 행정 자율성을 누린다. 이 기관은 선거 재판소와 함께 에콰도르의 5개 정부 부처 중 하나인 선거 관리 기구를 구성한다.
4.1.5. 투명성 및 사회 통제 기구
투명성 및 사회 통제 기구는 시민 참여 및 사회 통제 평의회, 옴부즈맨, 국가 감사원장, 그리고 감독관으로 구성된다. 이 기구의 구성원은 5년 임기이다. 이 기구는 투명성을 증진하고 공공연하게 계획을 통제하며, 부패 방지 메커니즘을 설계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특정 당국을 지정하며, 국가의 책임 규제 메커니즘이 되는 책임을 진다.
4.2. 대외 관계

에콰도르는 1973년 석유 수출국 기구(OPEC)에 가입했으나 1992년에 회원 자격을 정지했다.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 하에서 OPEC에 복귀했다가, 레닌 모레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더 많은 수입을 얻기 위해 원유 수출을 늘리고자 2020년에 다시 탈퇴했다.
에콰도르는 남극 조약 회원국으로서 평화로운 과학 연구를 위해 남극에 연구 기지를 유지하고 있다. 에콰도르는 국제 문제에 대한 다자적 접근을 종종 강조해왔다. 에콰도르는 유엔(및 대부분의 전문 기구)의 회원국이며, 리오 그룹, 라틴 아메리카 경제 체제, 라틴 아메리카 에너지 기구, 라틴 아메리카 통합 협회, 안데스 공동체, 남미 은행(스페인어: Banco del Sur 또는 BancoSur) 등 많은 지역 그룹의 회원국이다.
2017년 에콰도르 의회는 '인간 이동성에 관한 법률'을 채택했다. 국제 이주 기구는 에콰도르가 헌법에서 보편적 시민권 개념의 증진을 확립한 최초의 국가로서, 이주민의 인권을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평가했다. 2019년 3월 에콰도르는 남미 국가 연합에서 탈퇴했다.
4.3. 인권

2003년 국제앰네스티 보고서는 보안군에 의한 인권 침해에 대한 기소가 거의 없으며, 그나마 있는 기소도 공정하거나 독립적이라고 간주되지 않는 경찰 법원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비판했다. 보안군이 일상적으로 수감자를 고문한다는 주장이 있다. 경찰 구금 중 사망한 수감자에 대한 보고도 있다. 때로는 미결 구금 기한을 초과하여 용의자가 석방될 때까지 법적 절차가 지연될 수 있다. 교도소는 과밀하고 구금 시설의 환경은 "끔찍하다".
유엔 인권 이사회(HRC)의 보편적 정례 검토(UPR)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과 NGO 통제 노력에 대해 다루었으며, 에콰도르가 의견 표명에 대한 형사 처벌을 중단하고 사법 개혁 이행을 지연시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에콰도르는 명예훼손 비범죄화에 대한 권고를 거부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HRW)에 따르면, 라파엘 코레아 전 대통령은 언론인들을 위협하고 "공개적 비난과 보복 소송"에 처하게 했다. 피고인들이 사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인들에 대한 선고는 수년간의 징역과 수백만 달러의 배상금이었다. 코레아는 자신이 단지 중상모략적인 진술에 대한 철회를 요구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HRW에 따르면, 코레아 정부는 언론의 자유와 사법 제도의 독립성을 약화시켰다. 에콰도르의 현행 사법 제도에서 판사는 정부 임명이 아닌 공적 경쟁을 통해 선발된다. 그러나 선발 과정은 편향되고 주관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최종 면접이 "과도한 가중치"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코레아의 소송에서 그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린 판사와 검사들은 영구직을 받았고, 더 나은 평가 등급을 받은 다른 사람들은 거부되었다.
법률은 또한 특정 정치적 메시지나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기사와 미디어 메시지를 금지한다. 2012년 상반기에 20개의 민영 TV 또는 라디오 방송국이 폐쇄되었다. 환경 및 기타 문제에 반대하는 공개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테러 및 사보타주" 혐의로 기소되어 8년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프리덤 하우스에 따르면, 2017년 이후 미디어와 시민 사회에 대한 제한이 감소했다. 2022년 10월, 유엔은 다양한 구금 시설과 교도소의 심각한 상황 및 에콰도르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4.4. 행정 구역
에콰도르는 24개의 주(provincia프로빈시아스페인어)로 나뉘며, 각 주는 자체적인 행정 수도를 가지고 있다. 각 주는 다시 칸톤(cantón)으로, 칸톤은 파로키아(parroquia)로 세분된다.
에콰도르는 지리적으로 크게 네 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 라 코스타(La Costa, 해안 지역): 태평양 연안의 저지대로, 과야스주, 마나비주, 엘오로주, 에스메랄다스주, 로스리오스주, 산타엘레나주, 산토도밍고데로스차칠라스주가 속한다. 비옥한 농업 지대이며, 바나나, 카카오, 쌀 등이 주로 생산된다. 주요 도시는 과야킬이다.
- 라 시에라(La Sierra, 산악 지역): 안데스산맥이 관통하는 고산 지대로, 피친차주(수도 키토 소재), 아수아이주, 침보라소주, 임바부라주, 퉁구라우아주, 카냐르주, 로하주, 코토팍시주, 볼리바르주, 카르치주가 포함된다. 화산 활동이 활발하며, 전통적인 감자, 옥수수, 퀴노아 등이 재배된다.
- 엘 오리엔테(El Oriente, 동부 또는 아마존 지역): 아마존 열대우림 지역으로, 수쿰비오스주, 오레야나주, 파스타사주, 나포주, 모로나산티아고주, 사모라친치페주로 구성된다. 광대한 국립공원과 원주민 보호 구역이 있으며, 에콰도르 석유 매장량의 대부분이 이곳에 있다.
- 라 레히온 인술라르(La Región Insular, 섬 지역): 갈라파고스 제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토에서 서쪽으로 약 1000 km 떨어져 있다. 독특한 생태계로 유명하다.
에콰도르는 행정 효율성과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7개의 계획 구역(zona de planificación)으로도 나뉜다. 수도 키토와 최대 도시 과야킬은 수도권 구역(Distrito Metropolitano)으로 지정되어 있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제5계획구역에 포함되지만, 특별 관리 체제 하에 있다.
5. 군사
에콰도르 군대(Fuerzas Armadas de la República de Ecuador)는 육군, 공군, 해군으로 구성되며, 국가 영토의 보전과 국가 주권 수호를 명시된 책임으로 한다.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병력 규모는 약 5만 명 수준이다.
페루와의 계속된 국경 분쟁(2000년대 초반에 최종 해결됨)과 콜롬비아 게릴라 반군의 아마존 지방 침투 문제로 인해 에콰도르 군대는 일련의 변화를 겪었다. 2009년 국방부의 새 행정부는 군대 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시작하여 국방 예산을 16.90 억 USD(25% 증가)로 늘렸다.
육군 장교는 키토에 위치한 엘로이 알파로 장군 군사학교(c. 1838)에서 배출된다. 해군 장교는 살리나스에 위치한 에콰도르 해군사관학교(c. 1837)에서 배출된다. 공군 장교는 역시 살리나스에 위치한 코스메 레넬라 항공학교(c. 1920)에서 배출된다.
에콰도르 군대는 페루와의 세네파 전쟁(1995년) 등 주요 분쟁에 참여한 역사가 있다. 최근에는 국내 치안 유지 및 마약 조직 소탕 작전에도 투입되고 있으며, 2024년에는 정부가 "내부 무력 충돌"을 선포함에 따라 군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또한, 유엔 평화 유지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6. 지리

에콰도르는 남아메리카 북서부에 위치하며, 적도선이 국토를 관통한다. 국토 면적은 CIA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갈라파고스 제도를 포함하여 28.36 만 km2이며, 이 중 육지는 27.68 만 km2, 수역은 6720 km2이다. 에콰도르 외무부 자료에 따르면 총 면적은 25.64 만 km2이다. 북쪽으로는 콜롬비아와 약 590 km의 국경을, 동쪽과 남쪽으로는 페루와 약 1420 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면하며 약 2337 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적도상에 위치한 국가 중 가장 서쪽에 있다.
6.1. 지형

에콰도르는 크게 네 개의 주요 지리적 지역으로 나뉜다.
- 라 코스타(La Costa) 또는 "해안 지역": 안데스 산맥 서쪽의 지방들 - 에스메랄다스주, 과야스주, 로스리오스주, 마나비주, 엘오로주, 산토도밍고데로스차칠라스주, 산타엘레나주로 구성된다. 이곳은 에콰도르에서 가장 비옥하고 생산적인 땅으로, 돌과 치키타 같은 회사들의 대규모 바나나 수출 농장이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은 또한 에콰도르 쌀 작물의 대부분이 재배되는 곳이기도 하다. 해안 지방들은 활발한 어업을 하고 있다. 가장 큰 해안 도시는 과야킬이다.
- 라 시에라(La Sierra) 또는 "고산 지역": 시에라는 안데스 및 안데스 산맥 사이의 고산 지방들 - 아수아이주, 카냐르주, 카르치주, 침보라소주, 임바부라주, 로하주, 피친차주, 볼리바르주, 코토팍시주, 퉁구라우아주로 구성된다. 이 땅에는 에콰도르의 대부분의 화산과 모든 만년설 봉우리가 포함되어 있다. 농업은 전통 작물인 감자, 옥수수, 퀴노아에 집중되어 있으며, 인구는 주로 아메리카 원주민 키추아족이다. 시에라에서 가장 큰 도시는 키토이다.
- 라 아마소니아(La Amazonía), 또는 엘 오리엔테(El Oriente) 또는 "동부 지역": 오리엔테는 아마존 정글 지방들 - 모로나산티아고주, 나포주, 오레야나주, 파스타사주, 수쿰비오스주, 사모라친치페주로 구성된다. 이 지역은 주로 거대한 아마존 국립공원과 아메리카 원주민 보호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은 아마존 원주민 부족들이 전통적으로 계속 생활할 수 있도록 지정된 광대한 땅이다. 이곳은 또한 에콰도르에서 가장 큰 석유 매장량을 가진 지역이며, 이곳 상류 아마존의 일부는 석유 회사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개발되었다. 인구는 주로 혼합된 아메리카 원주민 슈아르족, 와오라니족, 키추아족이지만, 깊은 정글에는 거의 접촉되지 않은 수많은 부족들이 있다. 오리엔테에서 가장 큰 도시는 수쿰비오스의 라고아그리오이다.
- 라 레히온 인술라르(La Región Insular)는 태평양 본토에서 서쪽으로 약 1000 km 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에콰도르의 수도이자 두 번째로 큰 도시는 키토이며, 시에라 지역의 피친차주에 위치한다. 해발 2850 m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수도이다. 에콰도르에서 가장 큰 도시는 과야킬이며, 과야스주에 있다. 키토 바로 남쪽에 있는 코토팍시산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 중 하나이다. 에콰도르에서 가장 높은 산인 침보라소산(해발 6268 m) 정상은 지구의 타원체 모양 때문에 지구 중심에서 가장 먼 지점이다.
안데스 산맥은 동쪽으로 흐르는 아마존 유역과 태평양 유역 사이의 분수령이며, 태평양 유역에는 남북으로 흐르는 마타헤강, 산티아고강, 에스메랄다스강, 초네강, 과야스강, 후보네스강, 푸양고-툼베스강 등이 있다.
6.2. 기후
에콰도르는 적도에 위치해 있지만 고도에 따라 매우 다양한 기후를 나타낸다. 크게 해안 지역, 산악 지역, 아마존 지역, 갈라파고스 제도로 나뉘며 각 지역의 기후 특성이 뚜렷하다.
- 해안 (La Costa): 열대 기후로, 연중 따뜻하고 습하다. 1월부터 4월까지가 우기이며, 이 기간 동안 비가 많이 내리고 기온이 높다. 나머지 기간은 상대적으로 건조하다. 평균 기온은 약 25 °C이다.
- 산악 (La Sierra): 안데스산맥 고지대는 고도에 따라 기후가 크게 달라진다. 계곡 지역은 연중 온화한 온대 기후를 보이며, "영원한 봄"으로 불리기도 한다. 키토와 같은 고산 도시는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서늘하며, 연교차가 작다. 더 높은 고산 지대는 냉대 기후 또는 툰드라 기후를 나타내며, 만년설이 있는 곳도 있다.
- 아마존 (El Oriente): 전형적인 열대 우림 기후로, 연중 고온 다습하고 강수량이 매우 많다. 계절 변화가 거의 없으며, 일 년 내내 비가 자주 내린다.
- 갈라파고스 제도 (La Región Insular): 해류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건조하고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6월부터 12월까지는 한류인 훔볼트 해류의 영향으로 시원하고 건조하며, 12월부터 5월까지는 난류의 영향으로 따뜻하고 비가 오는 시기이다.
에콰도르는 적도에 위치하기 때문에 일년 내내 낮 시간의 변화가 거의 없다. 일출과 일몰은 매일 각각 6시경에 일어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에콰도르의 7개 빙하 중 54.4%가 40년 동안 사라졌으며, 2100년까지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기후 변화로 인한 것으로, 동식물군과 인구 모두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6.3. 생물 다양성

에콰도르는 국제 보존 협회(Conservation International)에 따르면 세계 17개 메가다양성 국가 중 하나이며, 단위 면적당 생물 다양성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에콰도르 대륙 지역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조류 종의 15%에 해당하는 1,600종의 조류가 서식하며, 갈라파고스 제도에는 38종 이상의 고유종이 있다. 16,000종 이상의 식물 외에도, 106종의 고유 파충류, 138종의 고유 양서류, 6,000종의 나비가 서식한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독특한 동물군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다윈의 진화론 탄생지로 유명하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에콰도르는 2008년 헌법에서 자연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한 세계 최초의 국가이다. 국가의 생물 다양성 보호는 "좋은 삶"(Buen Vivir) 국가 계획의 명시적인 국가 우선 과제이며, 목표 4 "자연의 권리 보장", 정책 1 "전략적 부문으로 간주되는 육상 및 해양 생물 다양성을 포함한 자연 유산의 지속 가능한 보존 및 관리"에 명시되어 있다.
2008년 계획 작성 당시 에콰도르 국토의 19%가 보호 지역으로 지정되었으나, 계획에는 국가의 생물 다양성을 진정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국토의 32%를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현재 보호 지역에는 11개의 국립공원, 10개의 야생동물 보호구역, 9개의 생태 보호구역 등이 포함된다. 2008년에 시작된 소시오보스케(Sociobosque) 프로그램은 민간 지주나 공동체 지주(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등)에게 토지를 원시림이나 초원과 같은 자연 생태계로 유지하도록 인센티브를 지급하여 전체 토지 면적의 또 다른 2.3%(6295 km2 또는 629,500헥타르)를 보존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자격과 보조금 비율은 해당 지역의 빈곤 수준, 보호될 헥타르 수, 보호될 토지의 생태계 유형 등 여러 요인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에콰도르는 2018년 산림 경관 보전 지수 평균 점수가 7.66/10으로, 172개국 중 세계 35위를 차지했다.
유네스코 목록에 등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갈라파고스는 다양한 부정적인 환경 영향으로 인해 위험에 처해 있으며, 이 이국적인 생태계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 또한, 아마존 열대우림의 석유 개발은 수십억 갤런의 미처리 폐기물, 가스, 원유를 환경으로 배출하여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 중 하나는 텍사코-셰브론 사건이다. 이 미국 석유 회사는 1964년부터 1992년까지 에콰도르 아마존 지역에서 운영되었다. 이 기간 동안 텍사코는 15개의 유전에서 339개의 유정을 시추하고 627개의 유독성 폐수 구덩이를 방치했다. 현재 이러한 고도로 오염되고 이제는 구식이 된 기술이 비용 절감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다큐멘터리 영화 크루드에서도 기록되었다.
2022년 에콰도르 대법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공동체와 자연의 집단적 권리에 과도한 희생을 초래하는 프로젝트는 수행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또한 정부에 토지에서의 산업 프로젝트에 대한 원주민의 의견을 존중하도록 요구했다.
7. 경제
에콰도르는 주로 석유 및 농산물과 같은 상품에 크게 의존하는 개발도상국 경제를 가지고 있다. 국가는 중상위 소득 국가로 분류된다. 에콰도르 경제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8번째로 크며 2000년에서 2006년 사이에 평균 4.6% 성장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에콰도르의 GDP는 연평균 4.3% 성장하여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지역 평균인 3.5%를 상회했다(유엔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경제 위원회, ECLAC). 에콰도르는 위기 동안 상대적으로 우수한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2009년 1월 에콰도르 중앙은행(BCE)은 2010년 성장 전망치를 6.88%로 설정했다. 2011년 GDP는 8% 성장하여 라틴 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2위)와 파나마(1위)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1999년과 2007년 사이에 GDP는 두 배로 증가하여 BCE에 따르면 654.90 억 USD에 달했다.
7.1. 경제 개관

에콰도르 경제는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며, 주로 석유와 농산물 같은 원자재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2000년 미국 달러를 공식 통화로 채택(달러화 정책)한 이후 경제적 안정을 어느 정도 이루었으나, 국제 유가 변동과 같은 외부 요인에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중간 수준이며, 최근 몇 년간 경제 성장률은 변동성을 보여왔다. 물가 상승률(인플레이션)은 달러화 이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으나, 실업률과 빈곤율은 여전히 중요한 사회경제적 과제로 남아있다. 특히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연평균 4.3%의 GDP 성장률을 기록하며 라틴 아메리카 평균을 상회했으나, 이후 유가 하락 등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기도 했다. 1999년부터 2007년까지 GDP는 두 배로 증가하여 에콰도르 중앙은행(BCE)에 따르면 654억 9천만 달러에 달했다. 2008년 1월까지의 물가상승률은 약 1.14%로, 지난 해 중 가장 높았다. 월간 실업률은 2007년 12월부터 2008년 9월까지 약 6~8%를 유지했으나, 2008년 10월에는 약 9%로 상승했다가 2008년 11월에는 다시 8%로 하락했다. 2009년 에콰도르의 연간 평균 실업률은 세계 경제 위기가 라틴 아메리카 경제에 계속 영향을 미치면서 8.5%였다. 이 시점부터 실업률은 하락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2010년 7.6%, 2011년 6.0%, 2012년 4.8%를 기록했다. 극빈층 비율은 1999년과 2010년 사이에 크게 감소했다. 2001년에는 인구의 40%로 추정되었으나, 2011년에는 총인구의 17.4%로 감소했다. 이는 미국 달러를 공식 거래 수단으로 채택한 이후 달성된 이민과 경제 안정 덕분이다(2000년 이전에는 에콰도르 수크레가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취약했다). 그러나 2008년부터 대부분의 에콰도르 이민자들이 일하는 국가들의 경제 성과가 부진해지면서, 주로 교육과 보건 분야의 사회 지출을 통해 빈곤 감소가 실현되었다.
7.2. 주요 산업
에콰도르의 경제는 다양한 산업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석유, 농업, 어업, 임업 등이 주요 역할을 담당한다.
- 석유 산업: 에콰도르 경제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 중 하나이다. 석유는 총 수출액의 약 40%를 차지하며, 국가 재정 수입의 상당 부분을 담당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석유 개발이 활발해졌으며, 확인된 매장량은 2011년 기준 약 65억 1천만 배럴로 추정된다. 주요 유전은 동부 아마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2021년 말, 에콰도르는 아마존의 주요 송유관(사유 OCP 송유관 및 국영 SOTE 송유관) 근처의 침식으로 인해 석유 수출에 대한 불가항력을 선언해야 했다. 이는 약 3주 동안 지속되었으며, 총 5억 달러 이상의 경제적 손실을 입은 후 2022년 초 생산량이 정상 수준인 하루 43만 5천 배럴로 돌아왔다.
- 농업: 전통적으로 중요한 산업으로, 다양한 작물이 재배된다. 바나나는 세계적인 주요 수출품목으로 수출량 세계 1위를 차지한다. 카카오 또한 품질이 우수하여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세계 7대 생산국 중 하나이다. 커피, 화훼류(특히 장미)도 주요 수출 농산물이다. 이 외에도 쌀, 감자, 카사바(마니옥, 타피오카), 플랜틴, 사탕수수 등이 국내 소비 및 일부 수출용으로 생산된다. 농업은 고용 창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어업: 태평양 연안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특히 새우 양식 및 수출이 활발하다. 참치를 비롯한 다양한 어종이 어획되어 국내 소비 및 가공 수출된다. 갈라파고스 제도 주변 해역은 중요한 어장이지만, 생태계 보호를 위한 규제가 적용된다.
- 임업: 아마존 열대우림을 중심으로 풍부한 목재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유칼립투스, 맹그로브, 발사나무 등이 주요 수종이며, 일부 지역에서는 상업적 벌채가 이루어진다. 지속 가능한 임업 관리가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시에라 지역에는 소나무와 삼나무가 식재되며, 과야스강 유역에는 호두나무, 로즈마리, 발사나무가 자란다.
- 제조업: 주로 국내 시장을 대상으로 하며, 과야킬과 키토를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 식품 가공, 섬유, 의류, 화학제품 등이 주요 분야이다. 최근 몇 년간 키토의 산업이 상당히 성장했으며, 이 도시는 또한 국내 최대의 비즈니스 중심지이기도 하다. 통조림 식품, 주류, 보석류, 가구 등 산업적으로 생산되거나 가공된 제품의 수출은 제한적이다. 소규모 산업 활동은 쿠엥카에도 집중되어 있다.
7.3. 무역
에콰도르는 개방 경제 체제를 지향하며 국제 무역이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요 수출품은 석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외에 바나나, 새우, 꽃, 카카오 등 농수산물이 주요 수출 품목이다. 수입품은 주로 공산품, 기계류, 원자재, 소비재 등이다.
주요 교역 상대국은 미국, 중국, 유럽 연합, 그리고 주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다. 2012년 8월 전체 무역수지는 2012년 첫 6개월 동안 약 3억 9천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2007년의 570만 달러에 불과했던 수치에 비해 엄청난 규모이다. 흑자는 2006년에 비해 약 4억 2천 5백만 달러 증가했다. 석유 무역수지 흑자는 2008년에 32억 9천 5백만 달러의 수입을 기록한 반면, 비석유 부문은 28억 4천 2백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미국, 칠레, 유럽 연합, 볼리비아, 페루, 브라질, 멕시코와의 무역수지는 흑자이다.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아시아와의 무역수지는 적자이다.
에콰도르는 안데스 공동체(CAN), 메르코수르(준회원국) 등 역내 경제 블록에 참여하고 있으며,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으로서 다자간 무역 체제에도 편입되어 있다. 또한, 미주개발은행(IDB),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라틴 아메리카 개발 은행(CAF) 등 다자간 기구에도 참여하고 있다. 2007년 4월, 에콰도르는 IMF에 대한 부채를 상환했다. 최근에는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7.4. 관광


에콰도르는 풍부한 자연 및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관광 산업이 발달한 국가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 프로그램에 힘입어 최근 몇 년간 관광 수입이 증가하고 있으며, 다양한 기후와 생물 다양성이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주요 관광지로는 다음이 있다:
- 자연 명소:
- 갈라파고스 제도: 독특한 동식물군과 진화의 증거를 볼 수 있는 세계적인 생태 관광지이다.
- 야수니 국립공원: 아마존 열대우림의 심장부로, 엄청난 생물 다양성을 자랑한다.
- 엘카하스 국립공원: 고산 호수와 독특한 파라모 생태계가 특징이다.
- 상가이 국립공원: 활화산과 다양한 고도의 생태계를 포함하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이다.
- 포도카르푸스 국립공원: 다양한 조류와 식물종이 서식한다.
- 빌카밤바: '장수촌'으로 알려진 계곡 마을이다.
- 바뇨스 데 아과 산타: 온천, 폭포, 액티비티로 유명한 관광 도시다.
- 문화 명소:
- 키토 역사 지구: 잘 보존된 식민지 시대 건축물과 교회들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미타드 델 문도: 적도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 잉가피르카: 에콰도르에서 가장 중요한 잉카 유적지이다.
- 쿠엥카 역사 지구: 아름다운 식민지풍 도시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다.
- 라타쿵가와 마마 네그라 축제: 독특한 지역 축제로 유명하다.
- 만년설 산:
- 안티사나 화산
- 카얌베 화산
- 침보라소 화산
- 코토팍시 화산
- 일리니사 화산군
- 해변:
- 아타카메스
- 바이아 데 카라케스
- 크루시타
- 에스메랄다스
- 만타
- 몬타니타
- 플라야스
- 살리나스
이러한 관광 자원들은 에콰도르 경제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으며, 고용 창출 및 지역 사회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에콰도르는 세계에서 생물 다양성이 가장 풍부한 17개국 중 하나로 꼽히며, 단위 면적당 생물 다양성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국가에 의해 26개의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동식물상이 보호받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토키야 밀짚모자와 사파라 원주민 문화가 인정받고 있다.
7.5. 교통

에콰도르의 교통 인프라는 최근 몇 년간 상당한 개선을 이루었으나, 여전히 발전의 여지가 남아있다. 주요 교통수단은 도로이며, 철도, 항공, 해상 교통도 이용된다.
- 도로망: 에콰도르의 도로는 최근 중요한 개선을 겪었다. 주요 경로는 범아메리카 고속도로(루미차카에서 암바토까지 4차선에서 6차선으로 확장 중, 암바토와 리오밤바 전 구간 4차선 완공, 리오밤바를 거쳐 로하까지 이어짐)이다. 로하와 페루 국경 사이 구간이 없는 경우, 에스폰딜루스 루트 또는 태양의 루트(에콰도르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도록 계획됨)와 아마존 간선도로(에콰도르 아마존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대부분의 주요 도시를 연결함)가 있다. 또 다른 주요 프로젝트는 만타-테나 도로, 과야킬-살리나스 고속도로, 알로아그-산토도밍고 고속도로, 리오밤바-마카스 도로(상가이 국립공원을 가로지름) 개발이다. 기타 새로운 개발로는 과야킬의 국립 통합 다리 단지,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의 나포강 다리, 동명의 도시 에스메랄다스의 에스메랄다스강 다리, 그리고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라틴 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에서 가장 큰 바이아-산 빈센테 다리가 있다.
- 철도: 에콰도르 철도의 복구 및 관광 명소로서의 재개장은 교통 문제에서 최근의 발전 중 하나이다. 과거에는 주요 교통수단이었으나 현재는 일부 구간만이 관광용 또는 제한적인 화물 운송용으로 운영되고 있다. 정부는 철도 현대화 및 확충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 항공: 주요 국제공항은 수도 키토의 마리스칼 수크레 국제공항과 최대 도시 과야킬의 호세 호아킨 데 올메도 국제공항이다. 이들 공항은 최근 수요 증가에 따라 현대화되었으며, 특히 키토 공항은 타바벨라에 새로 건설되어 2013년 2월에 개장했다. 그러나 키토 도심에서 새 공항으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는 2014년 말에야 완공될 예정이어서, 현재 공항에서 키토 시내까지 이동하는 데 러시아워에는 최대 2시간이 소요된다. 키토의 옛 도심 공항은 일부 경공업 용도로 사용되면서 공원 부지로 전환되고 있다. 국내선 항공망도 잘 갖추어져 있어 주요 도시 간 이동이 편리하다.
- 항구: 과야킬은 에콰도르의 주요 항구 도시로, 태평양을 통한 국제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만타, 에스메랄다스 등 다른 항구들도 지역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 도시 교통: 쿠엥카의 트램은 도시에서 가장 큰 대중교통 시스템이자 에콰도르 최초의 현대식 트램이다. 2019년 3월 8일에 개통되었다. 20.4 km의 노선과 27개의 역을 갖추고 있다. 매일 12만 명의 승객을 수송할 예정이다. 노선은 쿠엥카 남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파르케 인두스트리알 지역에서 끝난다. 키토와 과야킬 같은 대도시에는 버스, 택시 등 다양한 대중교통 수단이 운영되고 있으며, 키토에는 간선급행버스체계(BRT)인 '트롤레부스'가 운행 중이다.
7.6. 과학 및 연구

에콰도르는 2013년 세계 경제 포럼 연구에서 기술 혁신 부문 96위를 차지했다. 에콰도르는 2024년 글로벌 혁신 지수에서 105위를 기록했다. 에콰도르 과학 분야의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1707년 리오밤바에서 태어난 수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인 페드로 비센테 말도나도와 1747년 키토에서 태어난 인쇄업자, 독립운동의 선구자, 의학 개척자인 에우헤니오 에스페호가 있다. 다른 주목할 만한 에콰도르 과학자 및 기술자로는 1837년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잠수함을 건조한 선구자인 호세 로드리게스 라반데라 중위, 안데스 식물학자이자 생물학자인 레이날도 에스피노사 아길라르, 그리고 직물 날염 방법 발명가이자 화학자인 호세 아우렐리오 두에냐스가 있다.
에콰도르의 주요 과학 연구 분야는 의학 분야, 열대 및 전염병 치료, 농업 공학, 제약 연구, 생명 공학 등이다. 소규모 국가이자 외국 기술의 소비국인 에콰도르는 정보 기술 분야에서 기업가 정신이 뒷받침하는 연구를 선호해 왔다.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 체크프로그램, 은행 보호 시스템 엠디락, 핵심 뱅킹 소프트웨어 코비스는 에콰도르 개발의 산물이다.
주요 연구 기관으로는 국립 고등 교육 연구원(IAEN), 에콰도르 국립 과학 기술 연구원(SENESCYT) 등이 있으며, 대학들도 연구 활동을 수행한다. 정부는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해 투자를 확대하고 국제 협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 연구 개발 투자 규모나 혁신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다.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국가 특성을 살려 생태학, 환경 과학 분야의 연구도 활발하다.
8. 사회
에콰도르 사회는 다양한 인종 구성, 언어, 종교, 그리고 지역적 특색을 지닌 복합적인 모습을 보인다.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 빈부 격차, 교육 및 보건 접근성 불균형 등 사회적 과제들도 안고 있다.
8.1. 인구 구성

에콰도르의 인구는 매우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4년 유엔 추계에 따르면 에콰도르의 인구는 18,364,057명이다. 가장 큰 민족 집단은 메스티소(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계, 주로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의 혼혈)로, 인구의 약 71%를 차지한다 (해안 지역 메스티소 인구를 지칭하는 용어인 몬투비오족을 포함하면 약 79%까지 올라간다).
백인 에콰도르인은 에콰도르 인구의 6.1%를 차지하는 소수 민족이며, 주로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에콰도르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콰도르의 백인 인구는 식민 시대에는 주로 스페인 출신 후손이었지만, 오늘날 에콰도르의 백인 인구는 20세기 초에 정착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출신 사람들을 포함한 유럽 이민자들의 혼합 결과이다. 또한, 주로 키토와 과야킬에 기반을 둔 소규모 유럽 유대인(에콰도르 유대인) 인구가 있다. 5,000명의 롬인이 에콰도르에 거주한다.
에콰도르에는 아시아계 인구도 소수 있으며, 주로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이민자 후손과 같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서아시아 출신(기독교 또는 이슬람교도, 에콰도르의 이슬람 참조)과, 19세기 후반 광부, 농장 노동자, 어부로 도착한 일본 및 중국계 후손으로 구성된 동아시아 공동체가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현재 인구의 7%를 차지한다. 에콰도르 해안 지방의 주로 농촌 지역인 몬투비오 인구는 파르도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인구의 7.4%를 차지한다.
아프리카계 에콰도르인은 에콰도르의 소수 민족(7%)으로, 물라토와 삼보를 포함하며, 주로 에스메랄다스주와 과야스주 및 마나비주와 같은 해안 지역의 메스티소 우세 지방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다. 주로 메스티소, 백인,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가 존재하는 고지 안데스 지역에서는 임바부라주의 초타 계곡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아프리카계의 존재가 거의 없다.
8.2. 언어
에콰도르에서는 주로 스페인어(인구의 93%)가 사용되며, 키추아어(4.1%), 기타 원주민 언어(0.7%) 및 외국어(2.2%)도 사용된다. 공식 언어는 스페인어이다. 1991년에는 북부 키추아어(케추아어) 및 기타 식민지 이전 아메리카 언어를 250만 명이 사용했다. 에스놀로그는 에콰도르에 약 24개의 살아있는 토착 언어가 있다고 추정한다. 24개 언어 중에는 아와족이 사용하는 아와피트어, 코판족이 사용하는 아잉개어, 슈아르족이 사용하는 슈아르 치참어, 아추아르족과 시위아르족이 사용하는 아추아르-시위아르어, 차치족이 사용하는 차팔라치어, 차칠라족이 사용하는 차피키어, 시오나족과 세코야족이 사용하는 파이코카어, 와오라니족이 사용하는 와오 테데데오어가 있다. 이러한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의 사용은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스페인어로 대체되고 있다.
대부분의 에콰도르인들은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스페인어의 보편성은 국가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에콰도르는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른 스페인어 억양의 뚜렷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에콰도르 스페인어의 특이성은 국가의 독특한 지역에 기원하고 정착한 민족 및 인종 집단을 반영한다.
세 가지 주요 지역 변형은 다음과 같다:
- 적도 태평양 스페인어 또는 적도 해안 스페인어
- 안데스 스페인어
- 아마존 스페인어
8.3. 종교
에콰도르 국립 통계 인구 조사 연구소(INEC)에 따르면, 인구의 약 80.4%가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이며, 약 11.3%가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 1.3%가 여호와의 증인이다. 기타 종교를 믿는 비율은 약 7%이며, 약 8%는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이다. 한편, 2014년 퓨 리서치 센터 조사에 따르면 가톨릭교 신자는 79%, 개신교 신자는 13%, 무종교는 5%, 기타 종교는 3%로 나타났다.
에콰도르 농촌 지역에서는 토착 신앙과 가톨릭이 혼합되어 지역적인 민간 신앙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대부분의 축제와 연례 행렬은 종교적 기념행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많은 경우 의식과 상징이 혼합되어 있다.

소수의 동방 정교회 신자, 토착 종교 신자, 무슬림(에콰도르의 이슬람 참조), 불교 신자, 바하이교 신자가 있다. 그들의 추정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인구의 약 1.4%인 211,165명의 회원을 2012년 말 기준으로 보유하고 있다. 그들의 자료에 따르면 2017년에는 92,752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다.
에콰도르 유대인의 역사는 16세기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까지 대다수는 세파르딤이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아누심(비밀 유대인)이었다. 아슈케나짐 유대인은 1933년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가 부상한 후 주로 난민으로 도착했으며, 1940년 에콰도르에는 3,000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정점이었던 1950년에는 에콰도르의 유대인 인구가 4,000명으로 추산되었으나, 2020년경에는 약 290명으로 감소하여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작은 유대인 공동체 중 하나를 형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미국이나 이스라엘으로 떠나기 때문에 이 수는 감소하고 있다. 오늘날 에콰도르 유대인 공동체(Comunidad Judía del Ecuador)는 키토에 본부를 두고 있다. 쿠엥카에는 매우 작은 공동체가 있다.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Comunidad de Culto Israelita)는 과야킬의 유대인들을 통합한다. 이 공동체는 "에콰도르 유대인 공동체"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단 3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8.4. 보건

에콰도르의 공공 의료 시스템의 현재 구조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콰도르 공중보건부(Ministerio de Salud Pública del Ecuador)는 공중 보건 정책 및 건강 관리 계획의 규제 및 수립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공중보건부 장관은 공화국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다.
공중보건부의 철학은 가장 취약한 인구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서비스이며, 주요 행동 계획은 지역 사회 보건 및 예방 의학을 중심으로 한다. 많은 미국 의료 단체들이 가난한 지역 사회에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대도시에서 떨어진 곳에서 종종 의료 선교를 수행한다.
공공 의료 시스템은 환자가 예약 없이 공립 종합 병원에서 일반의 및 외래 진료소(Consulta Externa)의 전문의에게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소아과, 부인과, 임상 의학, 외과의 네 가지 기본 전문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만성 질환을 치료하거나 특정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하거나 일부 의료 전문 분야에서 더 나은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특화된 공립 병원도 있다.
잘 갖춰진 종합 병원은 주요 도시나 지방의 수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소규모 도시와 칸톤 도시에는 가족 진료 상담 및 소아과, 부인과, 임상 의학, 외과 치료를 위한 기본 병원이 있다.
지역 사회 보건 센터(Centros de Salud)는 도시의 대도시 지역과 농촌 지역에 있다. 이들은 입원 기간이 24시간 미만인 환자에게 치료를 제공하는 주간 병원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가 상당할 수 있는 농촌 지역에 배정된 의사들은 주요 도시의 주간 병원과 마찬가지로 환자 치료를 위해 작은 진료소를 책임진다. 이 경우 치료는 지역 사회의 문화를 존중한다.
공공 의료 시스템을 에콰도르 사회 보장 의료 서비스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정규직 고용을 하고 고용주를 통해 의무적으로 가입한 개인을 위한 것이다. 정규직 고용이 없는 시민도 자발적으로 사회 보장 시스템에 기여하고 사회 보장 시스템이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에콰도르 사회 보장 연구소(IESS)는 전국에 걸쳐 여러 주요 병원과 의료 하위 센터를 관리하고 있다.
에콰도르는 현재 가장 효율적인 의료 국가에서 20위를 차지하며, 2000년의 111위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다. 에콰도르인의 기대 수명은 77.1세이다. 영아 사망률은 생존 출생 1,000명당 13명으로, 1980년대 초 약 76명, 1950년 140명에서 크게 개선되었다. 5세 미만 아동의 거의 4분의 1, 즉 23%가 만성 영양실조 상태이다. 일부 농촌 지역의 인구는 식수를 이용할 수 없으며, 급수차를 통해 공급받는다. 인구 10만 명당 말라리아 환자는 686명이다. 의사 진료, 기본 수술, 기본 의약품을 포함한 기본 의료 서비스는 2008년부터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 공립 병원은 상태가 좋지 않고 환자의 높은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필수 물품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사립 병원과 진료소는 잘 갖춰져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 인구에게는 비싸다.
2008년에서 2016년 사이에 새로운 공립 병원이 건설되었다. 2008년에 정부는 보편적이고 의무적인 사회 보장 제도를 도입했다. 2015년 현재 부패는 여전히 문제이다. 공공 기관의 20%, 사립 기관의 80%에서 과다 청구가 기록되고 있다.
8.5. 교육

에콰도르 헌법은 모든 어린이가 "기본 교육 수준"(9학년으로 추정)을 달성할 때까지 학교에 다닐 것을 요구한다. 1996년 초등 순등록률은 96.9%였으며, 어린이의 71.8%가 5학년/10세까지 학교에 다녔다. 초등 및 중등 교육 비용은 정부가 부담하지만, 가정에서는 종종 수업료 및 교통비와 같은 상당한 추가 비용에 직면한다.
공립학교 공급은 필요한 수준에 훨씬 못 미치며, 학급 규모는 종종 매우 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는 교육비를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농촌 지역에서는 어린이의 10%만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2015년 보고서에서 교육부는 2014년 농촌 지역의 평균 학교 수료 연수는 7.39년인 반면 도시 지역은 10.86년이라고 밝혔다.
에콰도르의 주요 고등 교육 기관으로는 에콰도르 중앙 대학교(1826년 설립), 과야킬 대학교(1867년 설립), 쿠엥카 대학교(1868년 설립) 등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원주민들은 교육문화부 내에 "다문화 이중 언어 교육국"을 설치하여 스페인어와 원주민 언어(주로 케추아어, 슈아르어)로 이중 언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스페인어와 원주민 언어 모두를 습득한 원주민 자녀 교육에 힘쓰고 있다.
8.6. 주요 도시
에콰도르에는 다양한 규모와 특징을 가진 도시들이 분포해 있다. 이 중에서도 수도인 키토와 최대 도시인 과야킬이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 역할을 한다.
- 키토 (인구 약 278만 명): 에콰도르의 수도이자 피친차주의 주도이다. 안데스 산맥 고지대(해발 약 2850 m)에 위치하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도 중 하나이다. 잘 보존된 식민지 시대 역사 지구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부 기관, 주요 대학, 문화 시설이 밀집해 있다.
- 과야킬 (인구 약 272만 명): 과야스주의 주도이자 에콰도르 최대의 도시 및 주요 항구이다. 태평양 연안에 위치하며, 국가 경제 및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활기찬 상업 지구와 현대적인 건축물, 그리고 말레콘 2000과 같은 해안 산책로가 유명하다.
- 쿠엥카 (인구 약 63만 명): 아수아이주의 주도로, 아름다운 식민지 시대 건축물과 조약돌 거리로 유명하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도 알려져 있다.
- 산토도밍고 (인구 약 46만 명): 산토도밍고데로스차칠라스주의 주도로, 상업과 농업이 발달한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이다.
- 암바토 (인구 약 39만 명): 퉁구라우아주의 주도로, '꽃과 과일의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매년 열리는 다채로운 축제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마찰라, 포르토비에호, 만타, 로하, 리오밤바 등 여러 도시들이 각 지역의 경제 및 문화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8.7. 이민
에콰도르는 역사적으로 이민자와 이주민 모두를 경험한 국가이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는 유럽(주로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과 중동(주로 레바논, 팔레스타인)에서 이민자들이 유입되었다. 특히, 1875년부터 레바논 이민이 시작되었으며, 초기 이민자들은 주로 행상인으로 일했다.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압제를 피해 이주했지만, 오스만 여권을 소지했기 때문에 에콰도르인들은 그들을 "터키인"이라고 불렀다. 1930년에는 577명의 레바논 이민자와 489명의 후손이 거주했으며, 1986년 레바논 외무부 추산에 따르면 10만 명의 레바논 후손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주로 키토와 과야킬에 거주하며, 대부분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1900년대 초에는 이탈리아인, 독일인, 포르투갈인, 프랑스인, 영국인, 아일랜드인, 그리스인들의 이민도 있었다. 앙콘 마을은 1911년 영국 석유 회사 앵글로 에콰도리안 오일필즈에 98개의 광산이 양도되면서 영국 이민 물결을 경험했다.
1950년대에는 이탈리아인이 이민자 수에서 세 번째로 큰 국가 그룹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리구리아 출신 사람들이 여전히 이민 흐름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당시에는 에콰도르 전체 이민자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은 리구리아의 경제 상황 개선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이탈리아 이민자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은 이전처럼 리구리아 출신의 소규모 상인이 아니었다. 에콰도르로 이주한 사람들은 남중부 이탈리아 출신의 전문가, 기술자, 직원, 종교인이었다. 많은 이민자들, 그중에서도 상당수의 이탈리아인들이 칠레와의 페루 전쟁을 피해 페루에서 에콰도르 항구로 이주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탈리아 정부는 전통적으로 미국으로 갔지만 1921년 긴급 할당법으로 인해 더 이상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던 많은 이민자들을 위한 출구를 찾아야 할 필요성 때문에 에콰도르의 이민 현상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 공동체와 그 후손 대부분은 국가의 과야스주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20세기 동안에는 내전, 경제 위기, 독재 정권 등으로 인해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로부터의 이민도 있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출신이다. 2002년부터는 콜롬비아인과 베네수엘라인 난민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콜롬비아인들은 역사적으로 내전 시기에 이웃 국가에서 피난처를 찾아왔다. 최근에는 베네수엘라 경제 및 정치 위기를 피해 많은 베네수엘라인들이 에콰도르 도시에서 주목할 만한 존재가 되었다. 당국은 약 35만에서 40만 명의 콜롬비아인이 에콰도르에 거주한다고 주장하지만, 허술한 국경과 공식 등록 부족으로 구체적인 숫자는 알 수 없다.
2007년부터 에콰도르 정부는 1990년대 경제 위기나 잃어버린 10년 동안 떠났던 주로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출신의 에콰도르인들을 귀국시키기 위한 여러 계획을 만들었다. 이러한 정책은 귀국 국민의 흐름이 빠르고 현저하게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특히 유럽과 북미에 영향을 미친 2008년 경제 위기 동안 두드러졌다.
최근 몇 년 동안 에콰도르는 북미 국외 거주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반대로, 경제적 기회를 찾아 많은 에콰도르인들이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로 이주했으며, 이들의 송금은 에콰도르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등 주변국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을 피해 에콰도르로 유입되는 이민자들도 증가하고 있다.
9. 문화


에콰도르의 지배적인 문화는 메스티소 다수에 의해 정의되며, 그 조상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스페인 유산이며, 아메리카 원주민 전통에 의해 다양한 정도로 영향을 받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비유럽인 및 아프리카인 스페인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에콰도르로의 현대 이민의 첫 번째이자 가장 실질적인 물결은 1499년 유럽인이 도착한 후 스페인 식민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는 더 적은 수의 다른 유럽인과 북미인이 이 나라로 이주했으며, 더 적은 수로는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영국인, 아일랜드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중과 이후에는 일부 아시아인들이 이주했다.
에콰도르의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는 주류 문화에 다양한 정도로 통합되어 있지만, 일부는 특히 아마존 분지의 더 외딴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와 같이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실천할 수도 있다. 스페인어는 인구의 90% 이상이 모국어로 사용하며, 98% 이상이 모국어 또는 제2언어로 사용한다. 에콰도르 인구의 일부는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제2언어로 사용된다. 인구의 2%만이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만을 구사한다.
9.1. 음악
에콰도르의 음악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파시요(Pasillo)는 토착 라틴 음악의 한 장르이다. 에콰도르에서는 "국민 음악 장르"이다. 수년에 걸쳐 많은 문화가 그들의 영향을 한데 모아 새로운 유형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알바소, 파사카예, 폭스 인카이코, 토나다, 카피슈카, 봄바(아프리카계 에콰도르인 사회에서 매우 확립됨) 등 다양한 종류의 전통 음악도 있다. 테크노쿰비아와 로콜라는 외국 문화의 영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예이다. 에콰도르에서 가장 전통적인 춤 형태 중 하나는 산후아니토이다. 원래 에콰도르 북부(오타발로-임바부라)에서 유래했다. 산후아니토는 메스티소와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가 축제 기간 동안 연주하는 춤 음악의 한 유형이다. 에콰도르 음악학자 세군도 루이스 모레노에 따르면, 산후아니토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의 생일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추던 춤이었다. 이 중요한 날짜는 스페인인들에 의해 6월 24일로 정해졌는데, 공교롭게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인티 라이미 의식을 거행하던 날과 같은 날이다.
9.2. 요리


에콰도르 요리는 고도, 관련 농업 조건, 민족/인종 공동체에 따라 다양하다. 에콰도르의 대부분 지역은 수프, 쌀과 단백질을 포함하는 코스, 그리고 디저트와 커피로 마무리하는 전통적인 세 코스 식사를 따른다.
해안 지역에서는 해산물이 매우 인기가 있으며, 생선, 새우, 세비체가 식단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해안 지역에서는 쇠고기도 특히 많이 소비되며, 전통 요리로는 추라스코와 아로스 콘 메네스트라 이 카르네 아사다(콩과 구운 쇠고기를 곁들인 쌀밥)가 튀긴 플랜틴과 함께 제공된다. 후자는 과야킬 시의 상징적인 요리이다. 육류 기반 요리는 몬투비오 사람들의 목축 문화에서 유래했다.
세비체는 잉카 이전 시대부터 유래한 필수적인 해안 요리이다. 종종 튀긴 플랜틴(치플레 또는 파타코네스), 팝콘 또는 토스타도와 함께 제공된다. 플랜틴 및 땅콩 기반 요리는 많은 시민들의 서아프리카 뿌리를 반영하여 해안 지역에서 매우 흔하다. 엔코카도스(코코넛 소스를 포함하는 요리)도 에스메랄다스 시를 중심으로 한 북부 해안에서 매우 인기가 있다. 해안은 또한 바나나, 카카오콩(초콜릿 제조용), 새우, 틸라피아, 망고, 패션프루트 등의 주요 생산지이기도 하다.
브라질의 팡 지 케이주와 유사한 판 데 유카는 "요구르트 페르사"와 함께 제공되며 많은 해안 도시에서 간식으로 자주 먹는다. 그 기원은 해안에 정착한 페르시아 및 중동 인구에서 비롯된다.
고산 지역에서는 돼지고기, 닭고기, 쿠이(기니피그) 등 다양한 요리가 인기가 있으며, 다양한 곡물(특히 쌀과 모테) 또는 감자와 함께 제공된다. 주로 원주민 공동체에서 필수적인 "쿠이" 또는 기니피그의 소비는 고지대의 주로 토착적인 특성을 반영한다. 진미로 여겨지며 종종 순한 돼지고기 맛이 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아마존 지역에서는 유카(다른 곳에서는 카사바라고 불림)가 주식이다. 이 지역에서는 바나나, 나무 포도, 복숭아 야자 등 많은 과일을 맛볼 수 있다.
9.3. 문학

식민지 에콰도르의 초기 문학은 나머지 스페인령 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황금기의 영향을 받았다. 가장 초기 사례 중 하나는 오늘날 이바라 북부 마을의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이었던 하신토 코야후아소로, 160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스페인인에 의한 원주민의 초기 억압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코야후아소는 카스티야어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웠지만, 그의 작품은 케추아어로 쓰여졌다. 키푸 사용은 스페인인에 의해 금지되었고, 그들의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잉카 시인들은 모국어인 케추아어로 글을 쓰기 위해 라틴 알파벳을 사용해야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중 가장 오래된 현존 문학 작품인 잉카 드라마 "오얀타이"의 배경 이야기는 코야후아소의 작품과 일부 유사점을 공유한다. 코야후아소는 투옥되었고 그의 모든 작품은 불태워졌다. 그의 문학 작품의 존재는 수세기 후 키토의 한 식민지 시대 교회 벽을 복원하던 석공들이 숨겨진 원고를 발견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구조된 조각은 코야후아소가 쓴 시 "아타우알파의 죽음에 대한 애가"의 케추아어에서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으로, 아타우알파 왕을 잃은 잉카 민족의 슬픔과 무력감을 묘사한다.
다른 초기 에콰도르 작가로는 1725년 다울레에서 태어난 예수회 신부 후안 바우티스타 아기레와 1727년 리오밤바에서 태어난 후안 데 벨라스코 신부가 있다. 식민지 후기와 공화국 초기 유명 작가로는 에콰도르 식민지 시대 최초 신문의 인쇄업자이자 주요 저자인 에우헤니오 에스페호, 과야킬에서 태어나 시몬 볼리바르를 기리는 송시 후닌의 승리로 유명한 호세 호아킨 데 올메도, 저명한 수필가이자 소설가인 후안 몬탈보, 작품 "쿠만다" 또는 "야만인들 사이의 비극"과 에콰도르 국가로 유명한 후안 레온 메라, 아 라 코스타를 쓴 후안 A. 마르티네스, 돌로레스 베인티미야 등이 있다.
현대 에콰도르 작가로는 소설가 호르헤 엔리케 아도움, 시인 호르헤 카레라 안드라데, 수필가 벤하민 카리온, 시인 메다르도 앙헬 실바, 호르헤 카레라 안드라데, 에마누엘 사비에르, 루이스 알베르토 코스탈레스, 소설가 엔리케 힐 힐베르트, 소설 와시풍고(여러 언어로 번역됨)의 저자 호르헤 이카사, 단편 소설 작가 파블로 팔라시오, 소설가 알리시아 야네스 코시오 등이 있다. 특히 인디헤니스모 문학은 원주민의 삶과 사회 문제를 다루며 에콰도르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9.4. 미술

에콰도르에서 가장 잘 알려진 미술 양식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발전한 에스쿠엘라 키테냐(키토파)에 속하며, 그 예는 키토의 여러 오래된 교회에 전시되어 있다. 에콰도르 화가로는 인디헤니스타 운동의 에두아르도 킹만, 오스왈도 과야사민, 카밀로 에가스, 정보주의 운동의 마누엘 렌돈, 하이메 사파타, 엔리케 타바라, 아니발 비야시스, 테오 콘스탄테, 루이스 몰리나리, 아라셀리 힐베르트, 주디스 구티에레스, 펠릭스 아라우스, 에스투아르도 말도나도, 표현주의 및 구상 양식의 테디 코베냐, 추상적이고 미래적인 양식의 루이스 부르고스 플로르 등이 있다. 티구아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전통 회화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9.5. 스포츠
대부분의 남아메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에콰도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가장 잘 알려진 프로팀으로는 과야킬의 에멜레크, 키토의 리가 데 키토, 과야킬의 바르셀로나 SC, 상골키의 인데펜디엔테 델 바예, 에콰도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팀이자 지역 선수권 대회 최다 우승팀, 키토의 데포르티보 키토 및 엘 나시오날, 리오밤바의 올메도, 쿠엥카의 데포르티보 쿠엥카 등이 있다. 현재 에콰도르에서 가장 성공적인 축구팀은 LDU 키토이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우승한 유일한 에콰도르 팀이다. 또한 2008년 FIFA 클럽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에스타디오 모누멘탈 이시드로 로메로 카르보는 남아메리카에서 10번째로 큰 축구 경기장이다. 에콰도르 축구 국가대표팀은 네 차례 FIFA 월드컵에 출전했다.
에콰도르는 올림픽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육상 선수 헤페르손 페레스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20km 경보에서 금메달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이 외에도 배구의 변형인 에콰볼리(Ecua-volley)가 인기 있으며, 사이클링, 농구, 테니스 등도 즐겨 하는 스포츠이다.
9.6. 대중 매체
에콰도르의 대중 매체는 신문, 방송(텔레비전, 라디오)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주요 일간지로는 엘 코메르시오(El Comercio), 엘 우니베르소(El Universo) 등이 있으며, 전국적으로 발행된다. 여러 개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다수의 라디오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으며, 공영 방송과 민영 방송이 공존한다.
최근 몇 년간 인터넷 보급률이 증가하면서 온라인 뉴스 매체와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와 관련하여 과거 일부 정부 시절에는 비판적인 보도에 대한 압력이나 통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제기된 바 있다. 현재는 상대적으로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미디어 환경을 갖추고 있으나, 여전히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평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