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콩고 민주 공화국(République démocratique du Congo레퓌블리크 데모크라티크 뒤 콩고프랑스어)은 중앙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수도는 킨샤사이다. 면적 기준으로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11번째로 큰 나라이다. 인구는 약 1억 1,100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프랑스어권 국가이다. 콩고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나 오랜 기간 정치적 불안정, 식민 지배, 독재, 내전 등으로 인해 심각한 인도적 위기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왔다.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으며, 콩고 왕국, 루바 왕국, 룬다 왕국 등 여러 왕국이 번성했다. 19세기 후반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사유지인 콩고 독립국으로 편입되어 극심한 착취와 인권 유린을 겪었고, 이후 벨기에령 콩고로 식민 통치를 받았다. 1960년 독립했으나,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 암살, 카탕가 주 분리 독립 시도 등 콩고 위기를 겪었으며, 1965년 모부투 세세 세코의 쿠데타로 장기 독재 체제(자이르)에 들어섰다. 모부투 정권 붕괴 후 제1차 및 제2차 콩고 전쟁을 겪으며 수백만 명이 사망했고,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2019년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과제가 산적해 있다. 풍부한 광물 자원은 국가 경제의 핵심이지만, 동시에 '분쟁 광물' 문제와 부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민족 구성과 언어, 풍부한 생물 다양성 등 문화적, 자연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2. 국명
콩고 민주 공화국이라는 국명은 국토를 관통하는 콩고강에서 유래했다. 콩고강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강이자 유량 기준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1876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설립한 '오트콩고 연구위원회'(Comité d'études du haut Congo코미테 데튀드 뒤 오콩고프랑스어)와 1879년 그가 설립한 국제콩고협회 역시 이 강에서 이름을 따왔다.
콩고강의 이름은 16세기 유럽 초기 선원들이 콩고 왕국과 그곳의 반투족 주민인 콩고족을 만났을 때 그들을 따라 지은 것이다. '콩고'라는 단어는 콩고어(키콩고어라고도 함)에서 유래했다. 미국 작가 새뮤얼 헨리 넬슨에 따르면 "콩고라는 단어 자체는 공공 집회를 의미하며 '모으다'라는 뜻의 어근 '콩가'(konga콩가콩고어)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콩고족의 현대적 명칭인 '바콩고'(Bakongo바콩고콩고어)는 20세기 초에 도입되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과거에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면 콩고 독립국, 벨기에령 콩고, 콩고-레오폴드빌 공화국, 콩고 민주 공화국, 자이르 공화국이었다가 현재의 국명인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돌아왔다.
독립 당시 이 나라는 이웃한 콩고 공화국(공식 명칭은 콩고 공화국)과 구별하기 위해 콩고-레오폴드빌 공화국으로 명명되었다. 1964년 8월 1일 룰루아부르 헌법이 공포되면서 국명이 콩고 민주 공화국이 되었으나, 1971년 10월 27일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이 그의 '진정성'(Authenticité오탕티시테프랑스어) 정책의 일환으로 국명을 자이르(콩고강의 과거 이름)로 변경했다.
'자이르'라는 단어는 키콩고어 단어 '은자디'(nzadi은자디콩고어) (강)를 포르투갈어식으로 변형한 것으로, '강을 삼키는 강'이라는 뜻의 '은자디 오 은제레'(nzadi o nzere은자디 오 은제레콩고어)를 줄인 말이다. 이 강은 16세기와 17세기에는 '자이르'로 알려졌으며, 18세기 동안 영어 사용에서 '콩고'가 점차 '자이르'를 대체한 것으로 보이고, 19세기 문헌에서는 '콩고'가 선호되는 영어 명칭이지만,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이름(즉, 포르투갈어 사용에서 파생된 이름)으로서 '자이르'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흔했다.
1992년 주권국민회의는 국명을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변경하기로 의결했으나, 변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1997년 로랑데지레 카빌라 대통령이 모부투를 축출하면서 국명이 복원되었다. 이웃한 콩고 공화국과 구별하기 위해 '콩고 (킨샤사)', '콩고-킨샤사', 또는 '큰 콩고'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콩고 DR', 'DR 콩고', 'DRC', 'DROC',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RDC'로 약칭되기도 한다.
국제연합(UN)에는 콩고 공화국이 '콩고'라는 이름으로 가입되어 있으며, 콩고 민주 공화국은 정식 국명 전체로 가입하여 '민주 공화국' 부분이 생략되지 않는다. 1960년에는 '콩고 (레오폴드빌)'로 '콩고 (브라자빌)'(현재의 콩고 공화국)과 동시에 UN에 가입했으나, 1971년 자이르로 개명하면서 구별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당시 콩고 인민 공화국(현재의 콩고 공화국)이 '콩고' 명의로 변경했다. 1997년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콩고'라는 국명이 부활했지만, 이미 콩고 공화국이 '콩고'를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정식 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3. 역사
콩고 민주 공화국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으며, 초기 왕국 시대, 유럽 열강에 의한 식민지화, 독립 후의 정치적 혼란과 독재, 그리고 여러 차례의 내전과 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국가는 심각한 인도적 위기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왔다.
3.1. 초기 역사

현재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알려진 지리적 영역에는 약 9만 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이는 1988년 카탄다 지구에서 발견된 셈리키 작살로 증명된다. 이 작살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가시 작살 중 하나로, 거대한 강메기를 잡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반투족은 기원전 1천년 경 중앙아프리카에 도달하여 점차 남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확산은 목축업과 철기 시대 기술의 채택으로 가속화되었다. 남부와 남서부에 살던 사람들은 수렵 채집 집단이었으며, 이들의 기술은 금속 기술을 최소한으로만 사용했다. 이 시기 금속 도구의 발달은 농업을 혁신시켰고, 이는 피그미족을 대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투족의 이주 이후, 약 700년경부터 국가 및 계급 형성기가 시작되었으며, 현대 영토 내에는 세 개의 중심지가 있었다. 하나는 서쪽의 풀 말레보 주변, 다른 하나는 동쪽의 마이은돔베호 주변, 그리고 세 번째는 더 동쪽과 남쪽의 우펨바 저지대 주변이었다.
13세기까지 콩고강 서부 분지, 풀 말레보 주변에는 세 개의 주요 국가 연합체가 존재했다. 동쪽에는 일곱 개의 콩고 디아 늘라자 왕국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세력으로 여겨졌으며, 은순디, 음바타 왕국, 음팡구, 그리고 아마도 쿤디 왕국과 오캉가를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남쪽에는 현재의 앙골라에서 콩고강까지 뻗어 있는 음펨바가 있었으며, 음펨바 카시와 분다 등 다양한 왕국을 포함했다. 서쪽으로 콩고강 건너편에는 붕구(지도자), 카콩고, 응고요 등 세 개의 작은 국가 연합체가 있었다.
14세기에는 콩고 왕국이 세워져 서부 지역을 지배했다. 마이은돔베호 주변에는 므웨네 무지 제국이 세워졌다. 우펨바 저지대에서는 15세기에 루바 왕국이, 17세기에는 룬다 왕국이 각각 등장하여 동부 지역을 지배했다.
3.2. 콩고 독립국 (1877년-1908년)

벨기에의 탐험과 행정은 187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이루어졌다. 이는 처음에 헨리 모턴 스탠리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후원을 받아 탐험을 수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식민지 이전 콩고의 동부 지역은 주로 악명 높은 티푸팁과 같은 아랍-스와힐리 노예 상인들의 끊임없는 노예 약탈로 인해 심각하게 혼란스러웠으며, 티푸팁은 스탠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가 될 지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국제아프리카협회라는 위장 단체의 의장으로서 인도주의적 목표를 표방하며 유럽의 경쟁국들을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다.
레오폴드 국왕은 1885년 베를린 회담에서 콩고 영토에 대한 권리를 공식적으로 획득하고 이 땅을 자신의 사유지로 선포하며 콩고 독립국이라고 명명했다. 레오폴드 정권은 해안에서 수도 레오폴드빌(현 킨샤사)까지 이어지는 마타디-킨샤사 철도 건설과 같은 다양한 기반 시설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이 철도 완공에는 8년이 걸렸다.

콩고 독립국에서 식민주의자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고무 생산을 강요했는데, 자동차의 보급과 고무 타이어 개발로 인해 국제 시장에서 고무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고무 판매는 레오폴드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고, 그는 자신과 국가를 기리기 위해 브뤼셀과 오스텐더에 여러 건물을 지었다. 고무 할당량을 강제하기 위해 공공부대가 동원되었고, 원주민의 팔다리를 자르는 관행이 정책적으로 시행되었다.
콩고 독립국 체제 하에서는 민간 산업에 양허권이 부여되어 폭력과 자원 추출에 대한 독점권이 주어졌다. 이러한 양허 지역 중 가장 폭력적인 곳은 고무 농장 주변이었다. 양허 지역은 마을과 연계하여 현지 추장들을 고용하여 엄격한 할당량을 강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할당량을 준수하지 않거나 충족하지 못하면 가족을 납치하여 할당량을 충족할 때까지 인질로 잡거나 신체적 폭력을 가했다. 폭력은 할당량 징수를 보장하기 위해 고용된 유럽 민병대인 "마을 보초"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들 보초는 폭력에 대한 완전한 면책권을 부여받았으며, 적절한 감독 없이 실적이 저조한 노동자들을 살해하고 식인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5년부터 1908년까지 수백만 명의 콩고인이 착취와 질병의 결과로 사망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으며, 수면병과 천연두로 인해 콩고강 하류 주변 지역 인구의 거의 절반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대에 대한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1904년, 콩고 보마 주재 영국 영사 로저 케이스먼트는 영국 정부로부터 조사를 지시받았다. 그의 보고서인 케이스먼트 보고서는 인도주의적 학대에 대한 비난을 확인시켜 주었다. 벨기에 의회는 레오폴드 2세에게 독립적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강요했다. 그 결과는 케이스먼트의 학대 보고서를 확인시켜 주었고, 이 기간 동안 콩고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결론지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3.3. 벨기에령 콩고 (1908년-1960년)

1908년, 벨기에 의회는 초기에는 주저했지만 국제적 압력(특히 영국으로부터)에 굴복하여 레오폴드 2세로부터 독립국을 인수했다. 1908년 10월 18일, 벨기에 의회는 콩고를 벨기에 식민지로 합병하는 안을 가결했다. 행정권은 브뤼셀에 위치한 식민지부 장관에게 넘어갔고, 식민지 위원회(Conseil Colonial)가 그를 보좌했다. 벨기에 의회는 벨기에령 콩고에 대한 입법권을 행사했다. 1923년 식민지 수도는 보마에서 내륙으로 약 300 km 더 들어간 레오폴드빌로 이전했다.

콩고 독립국에서 벨기에령 콩고로의 전환은 단절이었지만, 상당 부분 연속성을 보이기도 했다. 콩고 독립국의 마지막 총독인 테오필 와이 남작은 벨기에령 콩고에서도 계속 재임했으며, 레오폴드 2세 행정부의 대다수도 그와 함께했다. 콩고와 그곳의 천연자원 및 광물자원을 벨기에 경제에 개방하는 것이 식민지 확장의 주된 동기로 남아 있었지만, 의료 및 기초 교육과 같은 다른 우선순위들이 점차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식민 행정가들이 영토를 통치했으며, 이중 법률 시스템이 존재했다(유럽 법원 시스템과 원주민 법원 시스템, 즉 tribunaux indigènes). 원주민 법원은 제한된 권한만을 가졌으며 식민 행정부의 확고한 통제하에 있었다. 벨기에 당국은 콩고에서 어떠한 정치 활동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공공부대는 모든 반란 시도를 진압했다.
벨기에령 콩고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1914년~1918년) 동안, 공공부대와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군 간의 초기 대치 상황은 1916년과 1917년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벨기에-포르투갈 연합군의 독일 식민지 영토 침공으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공공부대는 1916년 9월 샤를 통뵈르 장군의 지휘 하에 격렬한 전투 끝에 타보라에 입성하며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1918년 이후, 벨기에는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공공부대가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전 독일 식민지였던 루안다-우룬디에 대한 국제 연맹 위임 통치권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벨기에령 콩고는 런던의 벨기에 망명 정부에게 중요한 수입원을 제공했으며, 공공부대는 다시 한번 아프리카에서의 연합군 작전에 참여했다. 벨기에 장교들의 지휘 하에 벨기에령 콩고군은 특히 아우구스트-에두아르 길리아르트 소장의 지휘 아래 에티오피아의 아소사, 보르타이, 사이오에서 이탈리아 식민지군과 싸웠다.
3.4. 독립과 정치 위기 (1960년-1965년)


1960년 5월, 파트리스 루뭄바가 이끄는 성장하는 민족주의 운동인 콩고 국민 운동이 1960년 벨기에령 콩고 총선에서 승리했다. 루뭄바는 1960년 6월 24일 콩고 공화국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의회는 알리앙스 데 바콩고(ABAKO)당의 조제프 카사부부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외에도 앙투안 기젱가가 이끄는 아프리카 연대당과 알베르 델보, 로랑 음바리코가 이끄는 국민당 등이 등장했다.
벨기에령 콩고는 1960년 6월 30일 "콩고 공화국"(République du Congo레퓌블리크 뒤 콩고프랑스어)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60년 8월 15일, 이웃한 프랑스 식민지였던 중앙콩고(Moyen Congo) 역시 독립하면서 같은 이름인 '콩고 공화국'을 채택했다. 두 나라 간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전 벨기에령 콩고는 콩고 민주 공화국(DR 콩고)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전 프랑스 식민지는 '콩고 공화국'(콩고)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독립 직후 공공부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7월 11일에는 카탕가주(모이즈 촘베가 이끄는)와 남카사이주가 새 지도부에 맞서 분리 독립 투쟁을 벌였다. 독립 후에도 남아 있던 10만 명의 유럽인 대부분이 나라를 떠났다. 유엔이 루뭄바의 분리 독립 운동 진압 지원 요청을 거부하자, 루뭄바는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고, 소련은 이를 수락하여 군수품과 고문단을 파견했다. 8월 23일, 콩고군은 남카사이주를 침공했다. 루뭄바는 1960년 9월 5일 카사부부에 의해 해임되었는데, 카사부부는 남카사이주에서 군대에 의한 학살과 소련을 국내 문제에 끌어들인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루뭄바를 비난했다. 9월 7일, 루뭄바는 콩고 하원에서 연설하며 자신의 해임이 국법상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콩고 법은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정부 장관 해임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상하원 모두 루뭄바 해임을 거부했지만, 해임은 위헌적으로 진행되었다.
9월 14일, 조제프 모부투(훗날 모부투 세세 세코) 대령은 미국과 벨기에의 지원을 받아 루뭄바를 실각시켰다. 1961년 1월 17일, 루뭄바는 카탕가 당국에 넘겨져 벨기에가 이끄는 카탕가 군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2001년 벨기에 의회 조사 결과 벨기에는 루뭄바 살해에 "도덕적 책임"이 있으며, 이후 벨기에는 그의 죽음에 대한 역할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1961년 9월 18일, 계속되는 휴전 협상 중 은돌라 근처에서 발생한 비행기 추락 사고로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과 승객 15명 전원이 사망하여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광범위한 혼란 속에서 기술 관료들(Collège des commissaires généraux)이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카탕가 분리 독립은 1963년 1월 유엔군의 지원으로 종식되었다. 조제프 일레오, 시릴 아둘라, 모이즈 촘베 등 단명 정부들이 잇따라 집권했다.
한편, 나라 동부에서는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는 심바족 반군이 봉기하여 상당한 영토를 점령하고 스탠리빌에 공산주의 "콩고 인민 공화국"을 선포했다. 심바족은 1964년 11월 수백 명의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벨기에군과 미군이 수행한 군사 작전인 드라공 루즈 작전 중에 스탠리빌에서 축출되었다. 콩고 정부군은 1965년 11월까지 심바 반군을 완전히 격퇴했다.
루뭄바는 이전에 모부투를 신생 콩고군인 콩고 국군(Armée Nationale Congolaise)의 참모총장으로 임명했었다. 카사부부와 촘베 간의 지도력 위기를 틈타 모부투는 군 내에서 충분한 지지를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5년 모부투의 쿠데타 1년 전 헌법 국민투표 결과 국명이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공식 변경되었다. 1971년 모부투는 국명을 다시 "자이르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3.5. 모부투 독재와 자이르 (1965년-1997년)

모부투는 반공주의에 대한 그의 반대로 인해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미국은 그의 행정부가 아프리카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효과적인 대항마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일당제가 수립되었고 모부투는 자신을 국가원수로 선포했다. 그는 주기적으로 선거를 치렀는데, 그 선거에서 그는 유일한 후보자였다. 상대적인 평화와 안정이 달성되었지만, 모부투 정부는 심각한 인권 침해, 정치적 탄압, 개인숭배, 그리고 부패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67년 말까지 모부투는 정적과 경쟁자들을 자신의 정권에 편입시키거나 체포하거나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성공적으로 중립화시켰다. 1960년대 후반 내내 모부투는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를 계속 개편하고 관리들을 번갈아 임명했다. 1969년 4월 조제프 카사부부의 사망은 제1공화국 출신 인사가 그의 통치에 도전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70년대 초까지 모부투는 자이르를 아프리카의 주도적인 국가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는 아프리카 대륙을 자주 여행했으며 정부는 아프리카 문제, 특히 남부 지역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자이르는 부룬디, 차드, 토고 등 여러 소규모 아프리카 국가들과 준종속 관계를 맺었다.
부패가 너무 만연하여 '자이르 병'(le mal Zairois르 말 자이루아프랑스어)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심각한 부패, 절도, 경영 부실을 의미하며 모부투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제 원조는 대부분 차관 형태로 모부투를 부유하게 만들었고, 그는 도로와 같은 국가 기반 시설이 1960년에 존재했던 것의 4분의 1 수준으로 악화되도록 방치했다. 모부투와 그의 측근들이 정부 자금을 횡령하면서 자이르는 도둑정치 국가가 되었다.

아프리카 민족주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1966년 6월 1일부터 모부투는 국가 도시들의 이름을 변경했다. 레오폴드빌은 킨샤사(국가는 콩고-킨샤사로 알려짐), 스탠리빌은 키상가니, 엘리자베트빌은 루붐바시, 코퀼라트빌은 음반다카가 되었다. 1971년 모부투는 국명을 자이르 공화국으로 변경했는데, 이는 11년 만에 네 번째 국명 변경이자 전체적으로는 여섯 번째 변경이었다. 콩고강은 자이르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모부투는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하도록 초청받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와 만났다. 소련 해체 이후 미국의 모부투와의 관계는 냉각되었는데, 그가 더 이상 냉전 동맹국으로서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자이르 내부의 반대파들은 개혁 요구를 강화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모부투가 1990년 제3공화국을 선포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 헌법은 민주 개혁의 길을 열 것으로 예상되었다. 개혁은 대체로 형식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모부투는 1997년 군대가 그를 강제로 도피시킬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한 학자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은 모부투의 정치 변화 장악 시도를 용이하게 했으며", "또한 모부투 정권을 전복시킨 로랑데지레 카빌라의 반란을 지원했다"고 썼다.
1997년 9월 모부투는 모로코 망명 중 사망했다.
3.6. 대륙 전쟁 및 내전 (1996년-2007년)

1996년까지 르완다 내전과 집단학살, 그리고 르완다에서 투치족 주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르완다 후투족 민병대(인테라함웨)는 자이르 동부로 도피하여 난민 캠프를 르완다에 대한 침공 기지로 사용했다. 그들은 자이르군과 동맹을 맺고 자이르 동부의 콩고계 투치족에 대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르완다와 우간다 군대의 연합군이 모부투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자이르를 침공하여 제1차 콩고 전쟁을 시작했다. 연합군은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일부 반대파 인물들과 동맹을 맺어 콩고 해방 민주군 동맹이 되었다. 1997년 모부투는 도주했고 카빌라는 킨샤사로 진군하여 자신을 대통령으로 임명하고 국명을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되돌렸다.
카빌라는 나중에 외국 군대에 자국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르완다군은 고마로 후퇴하여 카빌라와 싸우기 위해 콩고 민주 집회(Rassemblement Congolais pour la Democratie)라는 새로운 투치족 주도 반군 군사 운동을 시작했고, 우간다는 콩고 군벌 장피에르 벰바가 이끄는 콩고 해방 운동이라는 반군 운동 창설을 선동했다. 두 반군 운동은 르완다군, 우간다군과 함께 1998년 콩고 민주 공화국군을 공격하며 제2차 콩고 전쟁을 시작했다. 앙골라, 짐바브웨, 나미비아 군대가 정부 편에 서서 적대 행위에 가담했다.

카빌라는 2001년에 암살당했다. 그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가 그를 계승하여 다자간 평화 회담을 요구했다. 유엔 평화유지군, MONUC(현재 MONUSCO로 알려짐)은 2001년 4월에 도착했다. 2002년~2003년, 벰바는 전 대통령 앙주펠릭스 파타세를 대신하여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개입했다. 회담 결과 카빌라가 이전 반군과 권력을 공유하는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2003년 6월까지 르완다군을 제외한 모든 외국 군대가 콩고에서 철수했다. 선거 후까지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유권자들에 의해 헌법이 승인되었고, 2006년 7월 30일 콩고 민주 공화국은 최초의 다당제 선거를 치렀다. 이는 1960년 이후 최초의 자유 총선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의 폭력 종식을 의미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카빌라와 벰바 간의 선거 결과 분쟁은 킨샤사에서 그들의 지지자들 간의 충돌로 번졌다. MONUC이 도시를 장악했다. 2006년 10월에 새로운 선거가 치러졌고 카빌라가 승리했으며, 2006년 12월에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3.6.1. 제1차 콩고 전쟁
제1차 콩고 전쟁(1996년~1997년)은 르완다 학살의 여파로 발생했다. 르완다의 후투족 민병대가 자이르 동부로 도피하여 그곳을 기지로 삼아 르완다를 공격하자, 르완다와 우간다 군대가 연합하여 자이르를 침공했다. 이들은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 세력인 콩고 해방 민주군 동맹(AFDL)과 손을 잡고 모부투 세세 세코 정권을 무너뜨렸다. 1997년 5월, 카빌라는 킨샤사에 입성하여 대통령을 자처하고 국명을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이 전쟁은 모부투의 오랜 독재를 종식시켰지만, 동시에 더 크고 복잡한 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3.6.2. 제2차 콩고 전쟁
제2차 콩고 전쟁(1998년~2003년)은 "아프리카의 세계 대전"이라고도 불리며,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분쟁 중 하나이다. 카빌라 대통령이 이전 동맹이었던 르완다와 우간다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자, 이들 국가는 새로운 반군 단체들(콩고 민주 집회, 콩고 해방 운동 등)을 지원하며 콩고 민주 공화국을 재침공했다. 이에 맞서 앙골라, 짐바브웨, 나미비아 등이 정부군을 지원하며 참전했다. 전쟁은 복잡한 양상을 띠며 수많은 무장 단체가 난립했고, 광물 자원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격화되었다. 국제 사회의 개입과 평화 협상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막대한 인도적 피해를 낳았다. 2001년 카빌라 대통령이 암살되고 아들 조제프 카빌라가 집권한 후, 2002년 프레토리아 협정을 거쳐 2003년에 공식적으로 종전되었으나, 동부 지역의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이 전쟁으로 약 54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7. 분쟁 지속 (2008년-2018년)


콩고 민주 집회-고마(RCD-Goma)의 일원이었던 로랑 은쿤다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병력과 함께 탈영하여 인민방위국민회의(CNDP)를 결성하고 정부에 대한 무장 반란을 시작했다. 2009년 3월, 콩고 민주 공화국과 르완다 간의 협정 이후 르완다군이 콩고 민주 공화국에 진입하여 은쿤다를 체포하고 FDLR 무장세력을 추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CNDP는 정부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정당이 되고 병사들을 국군에 통합하는 대가로 수감된 구성원들을 석방하기로 합의했다. 2012년 CNDP의 지도자인 보스코 은타간다와 그에게 충성하는 병력은 반란을 일으켜 반군 3월 23일 운동(M23)을 결성하고 정부가 조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발생한 M23 반란에서 M23은 2012년 11월 주도 고마를 잠시 점령했다. 이웃 국가, 특히 르완다는 반군 단체를 무장시키고 자원이 풍부한 국가를 장악하기 위한 대리인으로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들은 이를 부인했다. 2013년 3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유엔군 개입 여단에 무장 단체를 무력화할 권한을 부여했다. 2013년 11월 5일, M23은 반란 종료를 선언했다.
또한, 카탕가주 북부에서는 로랑 카빌라가 창설한 마이마이가 기데옹 키웅구 무탕가의 마이마이 카타 카탕가와 함께 킨샤사의 통제에서 벗어나 2013년 주도 루붐바시를 잠시 침공했고, 2013년 현재 주에서 40만 명이 피난했다. 이투리 분쟁에서는 민족주의 통합 전선과 콩고 애국자 연합 간에 전투가 간헐적으로 발생했는데, 이들은 각각 렌두족과 헤마족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북동부에서는 조지프 코니의 신의 저항군이 2005년 우간다와 남수단의 원래 기지에서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이동하여 가람바 국립공원에 캠프를 차렸다.
콩고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묘사되었다. 2009년, 뉴욕 타임스는 콩고 사람들이 매달 약 45,000명의 비율로 계속 사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장기 분쟁으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90만 명에서 54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자 수는 광범위한 질병과 기근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자 중 거의 절반이 5세 미만의 어린이다. 무기를 소지한 사람들이 민간인을 살해하고, 재산을 파괴하고, 광범위한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례가 빈번하게 보고되었으며,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집을 떠나야 했고, 기타 인도주의적 및 인권법 위반 사례도 보고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는 매년 40만 명 이상의 여성이 강간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과 2019년, 콩고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성폭력을 보고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와 뉴욕 대학교 기반 콩고 연구 그룹에 따르면, 2017년 6월부터 2019년 6월까지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 키부 지역의 무장 군대는 1,900명 이상의 민간인을 살해하고 최소 3,300명을 납치했다. 2018년 5월 10일, 콩고의 산부인과 의사 드니 무퀘게는 전쟁 및 무력 충돌의 무기로서의 성폭력 사용을 종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15년,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시위대는 카빌라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다. 시위는 콩고 하원에서 법안이 통과된 후 시작되었는데, 만약 이 법안이 콩고 상원에서도 통과된다면 카빌라는 최소한 전국 인구 조사가 실시될 때까지 집권하게 될 것이었다(이 과정은 몇 년이 걸릴 가능성이 높았고 따라서 그가 헌법상 참여할 수 없는 2016년 선거 이후에도 집권하게 될 것이었다). 이 법안은 통과되었지만, 인구 조사가 실시될 때까지 카빌라가 집권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은 삭제되었다. 인구 조사는 실시될 예정이지만, 더 이상 선거 시기와 연계되지 않는다. 2015년, 선거는 2016년 말로 예정되었고 콩고에서는 불안정한 평화가 유지되었다. 2016년 11월 27일, 레몽 치반다 콩고 외무장관은 언론에 2016년에는 선거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권자 등록 작업은 2017년 7월 31일에 종료되고 선거는 2018년 4월에 실시될 것으로 결정되었다." 카빌라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12월 20일, 전국적으로 시위가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수십 명의 시위대가 사망하고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현재 노르웨이 난민위원회 사무총장인 얀 에겔란에 따르면, 2016년과 2017년에 콩고 민주 공화국의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었으며, 시리아와 예멘 전쟁에 필적하는 주요 도덕적, 인도주의적 과제이지만 훨씬 적은 관심을 받고 있다. 여성과 어린이는 성적으로 학대당하고 "모든 가능한 방식으로 학대"당한다. 북키부주의 분쟁 외에도 카사이주 지역에서 폭력이 증가했다. 무장 단체들은 지역과 국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금, 다이아몬드, 석유, 코발트를 노렸다. 또한 민족적, 문화적 경쟁뿐만 아니라 종교적 동기와 연기된 선거로 인한 정치적 위기도 작용했다. 에겔란은 사람들이 콩고 민주 공화국의 상황이 "안정적으로 나쁘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악화되었다고 말한다. "15년 전 의제 최상위에 있었던 콩고의 대전쟁이 다시 돌아와 악화되고 있다." 분쟁으로 인한 파종 및 수확 차질로 인해 약 200만 명의 어린이가 기아에 시달릴 것으로 추정되었다.
휴먼 라이츠 워치는 2017년 카빌라가 임기 종료 시 사임 거부에 대한 전국적인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이전 3월 23일 운동 전투원들을 모집했다고 밝혔다. "M23 전투원들은 콩고 주요 도시의 거리를 순찰하며 시위대나 대통령에게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거나 체포했다"고 그들은 말했다. 마시시에서는 정부군과 강력한 지역 군벌인 델타 장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콩고 민주 공화국의 유엔 임무는 가장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평화 유지 노력이지만, 미국이 비용 절감을 주도한 후 2017년 마시시 인근의 유엔 기지 5곳을 폐쇄했다.
2018년 12월 16일~17일, 마이은돔베주 윰비에서 부족 갈등이 발생했다. 4개 마을의 바누누족 약 900명이 월간 부족 의무, 토지, 농경지, 수자원을 둘러싼 뿌리 깊은 경쟁 관계에 있는 바텐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학살당했다. 바누누족 약 100명은 콩고강의 모니엔데섬으로 피신했고, 다른 16,000명은 콩고 공화국의 마코팀포코구로 피신했다. 이 유혈 사태에는 군사적 전술이 동원되었으며, 일부 공격자들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현지 당국과 보안군 내 일부 요소들이 이들을 지원한 것으로 의심되었다.
3.8. 2018년 선거와 새 대통령 (2018년~현재)

2018년 12월 30일, 총선이 실시되었다. 2019년 1월 10일, 선거관리위원회는 야당 후보 펠릭스 치세케디를 대통령 선거 승자로 발표했고, 그는 1월 24일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결과가 조작되었고 치세케디와 카빌라 사이에 거래가 있었다는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공식 결과가 선거 감시단이 수집한 정보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부는 또한 키부에서의 에볼라 발병과 계속되는 군사 분쟁을 이유로 일부 지역의 투표를 3월까지 "연기"했다. 이러한 지역은 야당의 거점지로 알려져 있어 비판을 받았다. 2019년 8월, 펠릭스 치세케디 취임 6개월 후 연립 정부가 발표되었다.
카빌라의 정치적 동맹자들은 주요 부처, 입법부, 사법부, 보안 기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치세케디는 권력 장악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일련의 조치를 통해 그는 더 많은 국회의원을 확보하여 국회 의원 500명 중 거의 400명의 지지를 얻었다. 친카빌라 양원 의장은 축출되었다. 2021년 4월, 카빌라 지지자 없이 새 정부가 구성되었다.
2019년 대규모 홍역 유행으로 거의 5,000명이 사망했다. 에볼라 유행은 2년간 2,280명의 사망자를 낸 후 2020년 6월에 끝났다. 에콰퇴르주에서 또 다른 소규모 에볼라 유행이 2020년 6월에 시작되어 결국 55명의 사망자를 냈다. 세계적인 코로나19 범유행도 2020년 3월 콩고 민주 공화국에 도달했으며, 백신 접종 캠페인은 2021년 4월 19일에 시작되었다.
콩고 민주 공화국 주재 이탈리아 대사 루카 아타나시오와 그의 경호원은 2021년 2월 22일 북키부에서 살해되었다. 2021년 4월 22일, 케냐 대통령 우후루 케냐타와 치세케디 간의 회담 결과 양국 간 국제 무역 및 안보(테러 방지, 이민, 사이버 보안, 관세)를 증진하는 새로운 협정이 체결되었다. 2022년 2월, 쿠데타 시도 의혹으로 불확실성이 야기되었으나 쿠데타 시도는 실패했다.
2023년 대통령 선거 이후, 치세케디는 재선을 위한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2023년 12월 31일, 관리들은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이 73%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고 발표했다. 9명의 야당 후보는 선거를 거부하는 선언에 서명하고 재선거를 요구했다.
2024년 5월, 의회 지도부 선거와 관련된 의회 위기 중에 크리스티앙 말랑가는 쿠데타 시도를 주도했으나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보안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미국 여권을 소지한 것으로 알려진 교전 당사자 3명이 보안군에 체포되었고, 그들의 체포 영상이 온라인에 공유되었다.
르완다가 3월 23일 운동 반군의 고마 공세를 지원함에 따라, 콩고 민주 공화국은 2025년 1월 26일 양국 간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치세케디 대통령은 "르완다의 야만적인 침략"이라고 부르는 것에 맞서 FARDC 뒤에 시민들이 단결할 것을 촉구하며 국가 총동원령을 내렸다. 고마에서의 전투로 거의 3,000명이 사망했다. 고마 교도소에서 대규모 탈옥이 발생하는 동안 수백 명의 여성 수감자들이 강간당하고 산 채로 불태워졌다고 보고되었다.
4. 지리
콩고 민주 공화국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중앙에 위치하며, 북서쪽으로는 콩고 공화국, 북쪽으로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북동쪽으로는 남수단, 동쪽으로는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 및 탕가니카호를 사이에 두고 탄자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남쪽과 남동쪽으로는 잠비아, 남서쪽으로는 앙골라, 서쪽으로는 남대서양 및 앙골라의 카빈다주 외클레이브와 접한다. 국토는 북위 6도에서 남위 14도, 동경 12도에서 32도 사이에 걸쳐 있으며, 적도를 가로질러 북쪽에 3분의 1, 남쪽에 3분의 2가 위치한다. 면적은 234.54 만 km2로, 알제리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적도에 위치한 결과, 콩고 민주 공화국은 강수량이 많고 세계에서 뇌우 빈도가 가장 높다. 연간 강수량은 일부 지역에서 2000 round=5 이상에 달하며, 이 지역은 아마존 열대우림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콩고 열대우림을 유지하고 있다. 이 광대한 무성한 정글은 강의 광활하고 저지대인 중앙 배수분지 대부분을 덮고 있으며, 서쪽의 대서양을 향해 경사져 있다. 이 지역은 남쪽과 남서쪽의 사바나로 합쳐지는 고원, 서쪽의 산악 지형, 그리고 북쪽의 콩고강 너머로 뻗어 있는 빽빽한 초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빙하로 덮인 르웬조리 산맥은 극동 지역에서 발견된다.

열대 기후는 이 지역을 지형학적으로 지배하는 콩고강 수계와 그것이 흐르는 열대우림을 만들어냈다. 콩고 분지는 거의 전국토와 약 100.00 만 km2의 면적을 차지한다. 강과 그 지류들은 콩고 경제와 교통의 중추를 이룬다. 주요 지류로는 카사이강, 상하강, 우방기강, 루지지강, 아루위미강, 룰롱가강이 있다.

콩고강은 아마존강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유량과 두 번째로 큰 유역을 가지고 있다. 콩고강의 발원지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서쪽 지류를 따라 있는 알베르틴 지구대 산맥과 탕가니카호, 므웨루호이다. 강은 보요마 폭포 바로 아래의 키상가니에서 대체로 서쪽으로 흐르다가 점차 남서쪽으로 구부러져 음반다카를 지나 우방기강과 합류하여 풀 말레보(스탠리풀)로 흘러 들어간다. 킨샤사와 브라자빌은 풀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그런 다음 강은 좁아지고 리빙스턴 폭포로 통칭되는 깊은 협곡의 여러 폭포를 통과하여 보마를 지나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강과 북쪽 강둑의 폭 37 km 해안선은 이 나라의 유일한 대서양 출구이다.
알베르틴 지구대는 콩고의 지리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나라의 북동부 지역이 훨씬 더 산악 지형일 뿐만 아니라, 지각 운동으로 인해 화산 활동이 발생하여 때때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 지역의 지질 활동은 또한 아프리카 대호수를 만들어냈는데, 그중 4개(앨버트호, 키부호, 에드워드호, 탕가니카호)가 콩고의 동쪽 국경에 위치한다.
열곡대는 콩고 남부와 동부 전역에 걸쳐 막대한 양의 광물 자원을 노출시켜 채광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코발트, 구리, 카드뮴, 공업용 및 보석용 다이아몬드, 금, 은, 아연, 망간, 주석, 저마늄, 우라늄, 라듐, 보크사이트, 철광석, 석탄 등이 모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며, 특히 콩고 남동부 카탕가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2015년 금 생산량은 37톤이다.
2002년 1월 17일, 니라공고산이 분출하여 극도로 유동적인 용암 세 줄기가 시속 64 km/h로 흘러나왔고 폭은 46 m에 달했다. 세 줄기 중 하나는 고마를 직접 통과하여 45명이 사망하고 12만 명이 집을 잃었다. 분출 당시 40만 명 이상이 도시에서 대피했다. 용암은 키부호로 흘러 들어가 물을 오염시키고 식물, 동물, 물고기를 죽였다. 저장된 휘발유 폭발 가능성 때문에 현지 공항에서 비행기 두 대만 이륙했다. 용암은 공항을 통과하여 활주로를 파괴하고 주차된 여러 대의 비행기를 가두었다. 이 사건 6개월 후, 인근 니야무라기라산도 분출했다. 이 산은 이후 2006년과 2010년 1월에 다시 분출했다.
4.1. 기후 변화
콩고 민주 공화국은 기후 변화에 매우 취약한 국가 중 하나이다. 주요 영향으로는 강수량 패턴 변화로 인한 홍수 및 가뭄 빈도 증가, 기온 상승, 농업 생산성 감소, 수자원 부족, 생물 다양성 손실, 질병 확산(특히 말라리아) 등이 있다. 콩고 분지의 광대한 열대우림은 중요한 탄소 흡수원 역할을 하지만, 삼림 벌채와 토지 황폐화로 인해 그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 국가는 국가 적응 계획(NAP)을 수립하고 파리 협정에 따른 국가 결정 기여(NDC)를 제출하는 등 대응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재정 및 기술적 제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제 사회의 지원과 협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4.2. 생물 다양성과 보전

콩고 민주 공화국의 열대우림은 침팬지와 보노보(피그미 침팬지), 아프리카숲코끼리, 산악고릴라, 오카피, 숲버펄로, 표범, 그리고 나라 남쪽에는 남부흰코뿔소와 같이 희귀하고 고유한 종을 포함하여 엄청난 생물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이 나라의 국립공원 중 다섯 곳(가람바, 카후지-비에가, 살롱가, 비룽가 국립공원 및 오카피 야생동물 보호구역)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17개 생물 다양성 거대 국가 중 하나이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국가이다.
환경 보호론자들은 특히 영장류에 대해 우려해왔다. 콩고에는 여러 유인원 종이 서식하고 있다: 침팬지(Pan troglodytes), 보노보(Pan paniscus), 동부고릴라(Gorilla beringei), 그리고 아마도 서부고릴라(Gorilla gorilla)의 일부 개체군. 이곳은 보노보가 야생에서 발견되는 세계 유일의 국가이다. 유인원 멸종에 대한 우려가 많이 제기되었다.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인해, 한때 수백만 마리에 달했던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의 개체수는 현재 고릴라 약 20만 마리, 침팬지 10만 마리, 그리고 아마도 보노보는 약 1만 마리로 줄어들었다.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 오카피는 모두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 의해 멸종 위기종으로 분류되어 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의 주요 환경 문제로는 삼림 벌채, 야생 동물 개체수를 위협하는 밀렵, 수질 오염, 광업 등이 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콩고 민주 공화국의 삼림 벌채 속도는 두 배로 증가했다. 2021년에는 콩고 열대우림의 삼림 벌채가 5% 증가했다.
5. 정치
콩고 민주 공화국은 대통령 중심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헌법에 따라 대통령, 총리, 내각, 그리고 양원제 의회(상원 및 국민의회)로 구성된 정부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정치 체제는 다당제를 기반으로 하지만, 오랜 기간의 독재와 내전으로 인해 민주주의 발전이 더디고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4년간의 두 헌법 사이의 공백기 이후, 정부의 여러 수준에서 새로운 정치 기관이 설립되고 전국적으로 주에 대한 새로운 행정 구역이 설정되면서, 2006년에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었고 콩고 민주 공화국의 정치는 마침내 안정적인 대통령제 민주공화국으로 자리 잡았다.
2003년 과도 헌법은 양원제 입법부로 구성된 의회를 설립했으며, 이는 상원과 국민의회로 구성되었다.
상원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새로운 헌법을 기초하는 책임을 맡았다. 행정부는 대통령과 4명의 부통령이 이끄는 60명으로 구성된 내각에 위임되었다. 대통령은 또한 군대의 총사령관이기도 했다. 과도 헌법은 또한 헌법 해석 권한을 가진 대법원을 수장으로 하는 비교적 독립적인 사법부를 설립했다.
제3공화국 헌법으로도 알려진 2006년 헌법은 2006년 2월에 발효되었다. 그러나 2006년 7월 선거에서 선출된 공직자들이 취임할 때까지 과도 헌법과 동시에 효력을 가졌다. 새 헌법 하에서 입법부는 양원제를 유지했으며, 행정부는 대통령과 국민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 정당에서 임명된 총리가 이끄는 정부가 동시에 수행했다.
정부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책임을 진다. 새 헌법은 또한 주 정부에 새로운 권한을 부여하여, 주지사와 주 정부 수장을 선출하고 감독하는 주 의회를 창설했다. 새 헌법은 또한 대법원이 사라지고 세 개의 새로운 기관으로 분리되는 것을 보았다. 대법원의 헌법 해석 권한은 현재 헌법재판소가 보유하고 있다.
중앙아프리카 유엔 하위 지역에 위치하지만, 이 나라는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의 회원국으로서 경제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남아프리카와 제휴하고 있다.
5.1. 행정 구역
현재 이 나라는 수도인 킨샤사 시와 25개의 다른 주로 나뉜다. 주는 145개의 지구와 33개의 도시로 세분된다. 2015년 이전에는 11개의 주가 있었다.
1. 킨샤사 | 14. 이투리주 |
2. 중앙콩고주 | 15. 오트우엘레주 |
3. 쾅고주 | 16. 초포주 |
4. 퀼루주 | 17. 바스우엘레주 |
5. 마이은돔베주 | 18. 북우방기주 |
6. 카사이주 | 19. 몽갈라주 |
7. 카사이상트랄주 | 20. 남우방기주 |
8. 카사이오리앙탈주 | 21. 에콰퇴르주 |
9. 로마미주 | 22. 추아파주 |
10. 상쿠루주 | 23. 탕가니카주 |
11. 마니에마주 | 24. 오트로마미주 |
12. 남키부주 | 25. 루알라바주 |
13. 북키부주 | 26. 오트카탕가주 |
5.2. 대외 관계

콩고 민주 공화국의 외교 정책은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르완다, 우간다, 앙골라 등) 및 주요 강대국(미국, 중국, 프랑스, 벨기에 등)과의 관계, 그리고 국제기구(UN, AU 등)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역사적으로 벨기에와의 관계가 깊으며, 독립 이후에는 냉전의 영향과 내부 분쟁으로 인해 다양한 국가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풍부한 광물 자원은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지만, 동시에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고 있으며, 동부 지역의 불안정으로 인해 주변국과의 긴장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희소 원자재에 대한 전 세계적 수요 증가와 중국, 인도, 러시아, 브라질 및 기타 개발도상국의 산업 급증으로 인해 선진국들은 안보 필요에 필요한 전략적이고 중요한 자재의 적절한 공급을 지속적으로 식별하고 보장하기 위한 새롭고 통합적이며 대응적인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 콩고 민주 공화국이 미국 국가 안보에 미치는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엘리트 콩고 부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은 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의 군대를 전문화하려는 미국의 최근 추진력이다.
콩고에 더 많은 "안보"를 가져오려는 (외부 국가들의) 경제적, 전략적 유인이 있는데, 콩고는 산업 및 군사 분야에서 많이 사용되는 금속인 코발트와 같은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코발트의 가장 큰 용도는 고속 전투기용 제트 엔진 부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초합금이다. 코발트는 또한 자성 합금 및 절삭 및 내마모성 재료(예: 초경합금)에도 사용된다. 화학 산업은 석유 및 화학 처리용 촉매, 페인트 및 잉크용 건조제, 도자기 법랑용 밑칠, 도자기 및 유리용 탈색제, 도자기, 페인트 및 플라스틱용 안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량의 코발트를 소비한다. 이 나라는 전 세계 코발트 매장량의 80%를 보유하고 있다.
전기 자동차용 배터리와 전력망 안정화에 간헐적인 재생 가능 에너지 비율이 높은 전력 믹스에서 코발트의 중요성 때문에 콩고 민주 공화국이 지정학적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21세기에 들어 중국의 콩고 민주 공화국 투자와 콩고의 대중국 수출이 급증했다. 2019년 7월, 콩고 민주 공화국을 포함한 37개국의 유엔 주재 대사들은 중국의 위구르족 및 기타 소수 민족 무슬림 처우를 옹호하는 공동 서한에 유엔 인권 이사회에 서명했다. 2021년,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은 전임자 조제프 카빌라가 중국과 체결한 광업 계약, 특히 시코민(Sicomines)의 수십억 달러 규모의 '광물 대 인프라' 거래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했다.
5.3. 군사

콩고 민주 공화국 군대(FARDC, Forces Armées de la République Démocratique du Congo포르스 아르메 드 라 레퓌블리크 데모크라티크 뒤 콩고프랑스어)는 육군, 공군, 해군으로 구성된다. 또한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FARDC 지휘 체계 외부에 별도의 공화국 수비대가 있다. 2023년 기준으로 육군에는 103,000명, 해군에는 6,700명, 공군에는 2,550명, 중앙 사령부에는 14,000명, 공화국 수비대에는 8,000명의 병력이 있다. 모든 군종을 합하면 총 134,250명의 병력으로, 명목상 FARDC는 중앙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군대이다. 그러나 FARDC는 낮은 수준의 전문성, 훈련, 사기, 급여, 장비, 만연한 부패로 인해 약화되었으며, 차량과 항공기 부족으로 인해 광대한 국토 전역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FARDC는 제2차 콩고 전쟁이 끝난 후 2003년에 많은 이전 반군 단체를 통합하여 창설되었으며, 여전히 친정부 민병대와도 협력하고 있다. 그 이후로 이전 자이르 군대, 콩고 전쟁의 반군 단체, 그리고 최근에 통합된 기타 민병대의 다양한 조합으로 구성되어 왔다.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은 2022년에 보다 응집력 있는 국군을 창설하기 위한 군 개혁 시작을 발표했다. 이러한 노력에는 대부분의 고급 지휘관을 성공 기록이 있는 젊은 장교로 교체하고 2022년부터 2024년까지 군사 지출을 늘리는 것이 포함되었다.
군은 국방 구역으로 알려진 지리적 합동 사령부를 기반으로 조직되며, 각각 서부, 남중부, 동부 콩고 민주 공화국에 하나씩 있으며, 이는 다시 군사 지역으로 나뉜다. 육군은 여단으로 구성되며, 2011년 동부 콩고의 여단은 연대로 재편성되었다. 2023년에는 총 9개 여단, 27개 연대, 1개 포병대대, 1개 헌병대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많은 부대는 전투 손실과 탈영으로 인해 공식 병력의 절반 이하인 것으로 보고되었다. FARDC는 동부 콩고와 카사이주 지역에서 지역 마이마이 민병대, 르완다가 지원하는 3월 23일 운동(M23), 은두마 콩고 방위군-개혁파(NDC-R), 이슬람 국가의 일부가 된 민주군사동맹(ADF), 신의 저항군 등 100개 이상의 무장 단체와 수십 년 동안 싸워왔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유엔 핵무기 금지 조약에 서명했다.
5.4. 법 집행 및 범죄
콩고 국가경찰은 콩고 민주 공화국의 주요 경찰력이다. 국가는 높은 범죄율과 조직 범죄, 특히 무장 강도, 밀수, 부패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법 집행 기관은 자원 부족, 훈련 부족, 부패 등으로 인해 효과적인 치안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사법 시스템 또한 기능 장애와 정치적 간섭 문제에 직면해 있다. 동부 분쟁 지역에서는 무장 단체에 의한 범죄가 만연하며, 민간인 보호가 심각한 과제로 남아 있다.
5.5. 부패
콩고 민주 공화국은 심각한 부패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이는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이다. 모부투 세세 세코 정권 시절부터 부패는 제도화되었고, 이후 정권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지속되어 왔다. 모부투의 친척은 그가 통치하는 동안 정부가 불법적으로 수입을 걷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모부투는 우리 중 한 명에게 은행에 가서 백만 달러를 인출하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우리는 중개인에게 가서 5백만 달러를 가져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모부투의 권한으로 은행에 가서 천만 달러를 인출할 것입니다. 모부투는 백만 달러를 받고, 우리는 나머지 9백만 달러를 가져갔습니다." 모부투는 정적들이 자신의 통제력에 도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패를 제도화했고, 이는 1996년 경제 붕괴로 이어졌다.
모부투는 통치 기간 동안 5천만 달러에서 1억 2천 5백만 달러 사이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결코 최초의 부패한 콩고 지도자가 아니었다. 애덤 호크쉴드는 2009년에 "조직적인 절도 시스템으로서의 정부는 레오폴드 2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했다. 2009년 7월, 스위스 법원은 모부투가 스위스 은행에 예치한 약 670만 달러의 국제 자산 회수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므로 해당 자산을 모부투 가족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카빌라 대통령은 2001년 집권하자마자 경제 범죄 억제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2016년 이너프 프로젝트는 콩고가 폭력적인 도둑정치 국가로 운영되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2020년 6월, 콩고 민주 공화국 법원은 치세케디 대통령의 비서실장 비탈 카메르헤에게 부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는 공금 약 5천만 달러(3천9백만 파운드)를 횡령한 혐의로 20년의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부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카메르헤는 2021년 12월에 이미 석방되었다.
2021년 11월, 카빌라와 그의 측근들을 대상으로 한 사법 조사가 1억 3천 8백만 달러 횡령 혐의가 드러난 후 킨샤사에서 시작되었다.
부패는 정부 및 공공 부문 전반에 만연하며, 천연자원 채굴과 관련된 이권 다툼, 공금 횡령, 뇌물 수수 등이 주요 부패 사례로 지적된다. 이러한 부패는 국가 재정 손실, 공공 서비스 질 저하, 외국인 투자 위축 등 국가 발전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반부패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5.6. 인권

콩고 민주 공화국의 인권 상황은 매우 심각하며,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우려 대상이다. 특히 동부 분쟁 지역에서는 무장 단체들에 의한 살해, 성폭력, 소년병 징집, 강제 노동 등 심각한 인권 침해가 만연하고 있다. 콩고 민주 공화국 국제형사재판소 조사는 2004년 4월 카빌라에 의해 시작되었다. 국제형사재판소 검사는 2004년 6월 사건을 개시했다. 군대의 어린이는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대규모로 이용되었으며, 2011년에는 3만 명의 어린이가 여전히 무장 단체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2013년 미국 노동부의 최악의 아동 노동 형태에 관한 조사 결과에서는 강제 노동 및 아동 노동 사례가 관찰 및 보고되었으며, 2014년 12월 노동부의 아동 노동 또는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상품 목록에는 이 나라 광업에서 생산된 6개 상품이 포함되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2006년부터 동성결혼을 금지했으며, 성소수자 공동체에 대한 태도는 전국적으로 대체로 부정적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사회의 많은 부문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으로 보인다. 2013년~2014년 인구 보건 조사(299페이지)에 따르면 여성의 74.8%가 특정 상황에서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이 정당하다고 동의했다. 2006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전후 과도기에 여성의 인권 증진과 양성평등이 우선순위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했다. 대규모 강간, 성폭력, 성노예는 콩고 민주 공화국군과 동부 지역의 무장 단체에 의해 전쟁 무기로 사용된다. 특히 동부 지역은 "세계의 강간 수도"로 묘사되었으며, 그곳의 성폭력 만연은 세계 최악으로 묘사되었다.
여성 성기 절제(FGM)는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도 행해지지만, 대규모는 아니다. FGM의 유병률은 여성의 약 5%로 추정된다. FGM은 불법이며, 법은 생식기의 "신체적 또는 기능적 완전성"을 침해하는 모든 사람에게 2년에서 5년의 징역형과 20만 콩고 프랑의 벌금을 부과한다.
2007년 7월, 국제 적십자 위원회는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진자 이동" 현상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밤에 안전을 위해 서둘러 이동한다. 2007년 7월 콩고 동부를 순방한 유엔 여성 폭력 특별보고관 야킨 에르튀르크에 따르면, 북키부주와 남키부주에서의 여성에 대한 폭력은 "상상할 수 없는 잔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에르튀르크는 "무장 단체들이 지역 사회를 공격하고, 약탈하고, 강간하고, 여성과 어린이를 납치하여 성노예로 삼고 있다"고 덧붙였다. 2008년 12월, 가디언의 가디언필름스는 약탈하는 민병대에게 학대당한 400명 이상의 여성과 소녀들의 증언을 기록한 영화를 공개했다. 2010년 6월, 옥스팜은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강간 건수가 급격히 증가했다고 보고했으며, 하버드 연구원들은 민간인에 의한 강간이 17배 증가했음을 발견했다. 2014년 6월, 고문으로부터의 자유는 콩고 교도소에서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여성에 대한 처벌로 국가 관리들이 일상적으로 강간과 성폭력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보고서에 포함된 여성들은 수도 킨샤사를 포함한 전국 여러 지역과 분쟁 지역에서 떨어진 다른 지역에서 학대당했다. 2015년, 필림비, 에마뉘엘 웨이 등 국내외 인사들은 2016년 선거가 다가옴에 따라 폭력과 불안정을 억제할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 언론 자유 제한, 자의적 구금 문제도 심각하다. 정부와 국제 사회는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뿌리 깊은 문제와 지속적인 분쟁으로 인해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6. 경제
콩고 민주 공화국은 풍부한 광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빈곤과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 구조는 광업에 크게 의존하며, 농업과 서비스업도 일부 비중을 차지한다. 높은 실업률, 물가 상승, 그리고 콩고 프랑화 가치 불안정 등이 주요 경제 문제로 지적된다.
콩고 중앙은행은 콩고 민주 공화국의 주요 통화인 콩고 프랑을 개발하고 유지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2007년 세계은행은 향후 3년간 콩고 민주 공화국에 최대 13.00 억 USD의 지원금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콩고 정부는 2009년에 아프리카 사업법 조화 기구(OHADA) 회원국 가입 협상을 시작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나라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미개발된 원광 매장량은 24.00 조 USD를 초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전 세계 콜탄의 70%, 코발트의 3분의 1, 다이아몬드 매장량의 30% 이상, 구리의 10분의 1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막대한 광물 자원에도 불구하고 콩고 민주 공화국의 경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광물에서 수출 수입의 최대 70%를 창출했으며, 당시 자원 가격이 하락했을 때 특히 큰 타격을 입었다. 2005년까지 콩고 민주 공화국 수입의 90%가 광물에서 파생되었다. 콩고 시민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2023년 콩고인의 60%가 하루 2.15 USD 미만으로 생활했으며, 식품 가격 인플레이션은 173%에 달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세계에서 1인당 명목 GDP가 가장 낮거나 거의 가장 낮은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또한 콩고 민주 공화국은 부패 인식 지수에서 가장 낮은 순위를 기록한 20개국 중 하나이다.
6.1. 광업

콩고 민주 공화국은 세계 최대의 코발트 광석 생산국이자 구리와 다이아몬드의 주요 생산국이다. 2023년 현재, 이 나라는 전 세계 코발트 생산량의 약 70%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이아몬드는 서부의 카사이주에서 생산된다.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가장 큰 광산은 남부 카탕가주에 위치하며 고도로 기계화되어 연간 수백만 톤의 구리 및 코발트 광석 생산 능력과 금속 광석 정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다이아몬드 생산국이며, 대부분의 생산은 장인 및 소규모 광부들이 담당한다.
1960년 독립 당시 콩고 민주 공화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산업화된 국가였으며, 번창하는 광업 부문과 비교적 생산적인 농업 부문을 자랑했다. 외국 기업들은 장기적인 분쟁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기반 시설 부족, 어려운 운영 환경 때문에 사업을 축소했다. 전쟁은 불확실한 법적 프레임워크, 부패, 인플레이션, 정부 경제 정책 및 금융 운영의 투명성 부족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의 영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2002년 말, 침공한 외국 군대의 상당 부분이 철수하면서 상황이 개선되었다. 여러 국제 통화 기금 및 세계은행 사절단이 정부와 만나 일관된 경제 계획 개발을 지원했으며, 카빌라 대통령은 개혁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많은 경제 활동이 여전히 GDP 데이터 외부에 있다. 2011년까지 콩고 민주 공화국은 187개 순위 국가 중 가장 낮은 인간 개발 지수를 기록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의 경제는 광업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소규모 채굴에서 발생하는 소규모 경제 활동은 비공식 경제 부문에서 이루어지며 GDP 데이터에 반영되지 않는다. 콩고 민주 공화국 다이아몬드의 3분의 1이 국외로 밀반출되는 것으로 추정되어 다이아몬드 생산 수준을 정량화하기 어렵다. 2002년에는 나라 동부에서 주석이 발견되었지만 현재까지 소규모로만 채굴되고 있다. 분쟁 광물인 콜탄과 석석(각각 탄탈럼과 주석의 광석) 밀수는 콩고 동부 전쟁을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스위스 소유 회사인 카탕가 마이닝은 연간 175,000톤의 구리와 8,000톤의 코발트 생산 능력을 갖춘 루일루 야금 공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코발트 정제소이다. 대규모 복구 프로그램 이후, 이 회사는 2007년 12월에 구리 생산 작업을 재개했고 2008년 5월에는 코발트 생산을 재개했다.
2013년 4월, 반부패 NGO들은 콩고 세무 당국이 생산 호황과 긍정적인 산업 성과에도 불구하고 광업 부문에서 8,800만 달러를 회계 처리하지 못했다고 폭로했다. 누락된 자금은 2010년부터 발생했으며 세무 기관은 이를 중앙은행에 납부해야 했다. 이후 2013년, 채취산업 투명성 이행기구(EITI)는 불충분한 보고, 감시, 독립 감사로 인해 이 나라의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켰지만, 2013년 7월 이 나라는 회계 및 투명성 관행을 개선하여 EITI로부터 정회원 자격을 부여받았다.
2018년 2월, 글로벌 자산 운용사인 얼라이언스번스틴은 코발트 자원 때문에 콩고 민주 공화국을 경제적으로 "전기 자동차 시대의 사우디아라비아"로 정의했다. 코발트는 많은 전기 자동차에 동력을 공급하는 리튬 이온 배터리 생산에 필수적이다. 노천 코발트 채굴은 삼림 벌채와 서식지 파괴를 초래했다.
6.2. 교통

콩고 민주 공화국의 육상 교통은 항상 어려웠다. 콩고 분지의 지형과 기후는 도로 및 철도 건설에 심각한 장벽을 제시하며, 이 광대한 나라를 가로지르는 거리는 엄청나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아프리카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항해 가능한 강이 더 많고 보트와 페리로 더 많은 승객과 물품을 운송하지만, 항공 운송은 특히 농촌 지역에서 국내 여러 장소 간에 물품과 사람을 이동시키는 유일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남아 있다. 만성적인 경제 운영 실패, 정치 부패, 내부 갈등으로 인해 기반 시설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 부족이 초래되었다.
철도 운송은 콩고 철도 회사(콩고 국영 철도 회사), 콩고 국영 교통 항만 회사, 우엘레 철도 사무소(Office des Chemins de fer des Ueles, CFU)에서 제공한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아프리카에서 인구 및 면적 대비 전천후 포장 고속도로가 가장 적은 나라로, 총 길이는 2250 km이며 그중 양호한 상태는 1226 km에 불과하다. 이를 비교해 보면, 어느 방향으로든 국토를 횡단하는 도로 거리는 2500 km가 넘는다(예: 마타디에서 루붐바시까지 도로로 2700 km). 2250 km라는 수치는 인구 백만 명당 포장도로 35 km에 해당한다. 잠비아와 보츠와나의 비교 수치는 각각 721 km와 3427 km이다. 트랜스아프리카 고속도로망의 세 개 노선이 콩고 민주 공화국을 통과한다:
- 트리폴리-케이프타운 고속도로: 이 노선은 킨샤사와 마타디 사이의 국도 1호선을 따라 국토 서쪽 끝을 가로지르며, 양호한 상태의 몇 안 되는 포장 구간 중 하나로 거리는 285 km이다.
- 라고스-몸바사 고속도로: 콩고 민주 공화국은 이 동서 고속도로의 주요 미연결 구간이며,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로 건설이 필요하다.
- 베이라-로비투 고속도로: 이 동서 고속도로는 카탕가를 가로지르며 대부분 구간의 재건이 필요하다. 앙골라 국경과 콜웨지 사이는 흙길이고, 콜웨지와 루붐바시 사이는 상태가 매우 나쁜 포장도로이며, 잠비아 국경까지의 짧은 거리는 양호한 상태의 포장도로이다.
콩고 민주 공화국에는 수천 킬로미터의 항해 가능한 수로가 있다. 전통적으로 수상 운송은 국토의 약 3분의 2에서 주요 이동 수단이었다.
2024년 2월 기준으로, 콩고 민주 공화국에는 콩고 민주 공화국 내 항공편을 제공하는 주요 국영 항공사(콩고 항공)가 하나 있다. 콩고 항공은 킨샤사 국제공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인증한 모든 항공사는 부적절한 안전 기준으로 인해 유럽 위원회에 의해 유럽 연합 공항 운항이 금지되었다.
여러 국제 항공사가 킨샤사 국제공항에 취항하고 있으며, 일부는 루붐바시 국제공항으로 국제 항공편을 제공하기도 한다.
6.3. 에너지
석탄과 원유 자원은 2008년까지 주로 국내에서 사용되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잉가댐에서 콩고강으로부터 수력 발전을 위한 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나라는 또한 아프리카 산림의 50%와 대륙 전체에 수력 발전을 제공할 수 있는 강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이 나라의 전략적 중요성과 중앙아프리카 경제 강국으로서의 잠재적 역할에 대한 유엔 보고서에 따른 것이다.
전기 생산 및 배전은 국영전력회사(Société nationale d'électricité)가 관리하지만, 전기를 이용할 수 있는 지역은 전국토의 15%에 불과하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남아프리카 전력 풀, 동아프리카 전력 풀, 중앙아프리카 전력 풀 등 3개의 전력 풀 회원국이다.
햇빛이 풍부하기 때문에 콩고 민주 공화국의 태양광 개발 잠재력은 매우 높다. 이미 콩고 민주 공화국에는 약 836개의 태양광 발전 시스템이 있으며, 총 전력은 83MW로 에콰퇴르주(167개), 카탕가(159개), 북키부주(170개), 카사이 두 주(170개), 바콩고(170개)에 위치해 있다. 또한 148개의 카리타스 네트워크 시스템은 총 6.31MW의 전력을 생산한다.
7. 인구
콩고 민주 공화국의 인구는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높은 출산율과 상대적으로 높은 사망률(특히 영아 사망률)이 특징이다. 인구 밀도는 지역별로 차이가 크며, 도시 지역, 특히 수도 킨샤사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평균 기대 수명은 세계 평균에 비해 낮은 편이다.
7.1. 인구 통계
CIA 월드 팩트북은 2024년 기준 인구를 1억 1,500만 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1950년부터 2000년까지 이 나라의 인구는 1,220만 명에서 4,690만 명으로 거의 4배 증가했다. 2000년 이후로는 연간 약 3~3.5%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며 4,700만 명에서 약 1억 1,100만 명으로 증가했다.
7.2. 민족

콩고 민주 공화국에는 250개 이상의 민족 집단과 450개의 부족(민족 하위 집단)이 거주한다. 이들은 반투어군, 수단어군, 나일어군, 아다마와-우방기어군, 피그미 어족에 속한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콩고에는 지배적인 민족 집단이 없지만, 다음 민족 집단이 인구의 51.5%를 차지한다:
- 루바-카사이족
- 콩고족
- 몽고족
- 루바카트족
- 룰루아족
- 테텔라족
- 난데족
- 응반디족
- 응곰베족
- 야카족
- 응바카족
2022년 유엔은 이 나라의 인구를 1억 8백만 명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계속되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1992년의 3,910만 명에서 급격히 증가한 수치이다. 약 250개의 민족 집단이 확인되고 명명되었다.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은 콩고족, 루바족, 몽고족이다. 약 60만 명의 콩고 피그미족이 콩고 민주 공화국에 살고 있다.
7.3. 주요 도시
콩고 민주 공화국의 주요 도시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수도 킨샤사는 가장 큰 도시이자 행정 및 상업의 중심지이다. 루붐바시는 광업의 중심지이며, 음부지마이와 카낭가는 다이아몬드 산업과 관련된 중요한 도시이다. 키상가니는 콩고강 유역의 주요 교통 요충지이다. 이들 도시 외에도 고마, 부카부 등 동부 지역의 도시들은 분쟁과 난민 문제로 인해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으나, 지역 경제 및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순위 | 도시 | 행정 구역 | 인구 |
---|---|---|---|
1 | 킨샤사 | 킨샤사 | 15,628,000 |
2 | 음부지마이 | 동카사이주 | 2,765,000 |
3 | 루붐바시 | 오트카탕가주 | 2,695,000 |
4 | 키상가니 | 초포주 | 1,640,000 |
5 | 카낭가 | 카사이상트랄주 | 1,593,000 |
6 | 음반다카 | 에콰퇴르주 | 1,188,000 |
7 | 부카부 | 남키부주 | 1,190,000 |
8 | 치카파 | 카사이주 | 1,024,000 |
9 | 부니아 | 이투리주 | 768,000 |
10 | 고마 | 북키부주 | 707,000 |




7.4. 이주

콩고 민주 공화국의 불안정한 상황과 국가 구조의 상태를 고려할 때 신뢰할 수 있는 이주 데이터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증거에 따르면 최근 이민자 수가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콩고 민주 공화국은 계속해서 이민 대상 국가로 남아 있다. 이민은 매우 다양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의 수많은 폭력적인 분쟁의 산물인 난민과 망명 신청자는 인구의 중요한 하위 집합을 구성한다. 또한 이 나라의 대규모 광산 운영은 아프리카 및 그 외 지역에서 이주 노동자를 끌어들인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 및 세계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상업 활동을 위한 상당한 이주도 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잘 연구되지 않았다. 남아프리카와 유럽으로 향하는 경유 이주도 역할을 한다.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의 이민은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감소했는데, 이는 주로 이 나라가 겪은 무력 폭력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국제 이주 기구에 따르면 콩고 민주 공화국의 이민자 수는 1960년 100만 명이 조금 넘던 것에서 1990년 75만 4천 명, 2005년 48만 명, 2010년에는 약 44만 5천 명으로 감소했다. 공식 수치는 부분적으로 콩고 민주 공화국 비공식 경제의 우세로 인해 사용할 수 없다. 불법 이민자에 대한 데이터도 부족하지만, 이웃 국가들이 콩고 민주 공화국 국민과 민족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불법 이민은 중요한 현상으로 추정된다.
해외 거주 콩고 국민에 대한 수치는 출처에 따라 크게 다르며, 출처에 따르면 해외에 거주하는 콩고인은 300만 명에서 600만 명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불일치는 공식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콩고 민주 공화국 출신 이민자는 무엇보다도 장기 이민자이며, 대다수는 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유럽에는 그보다 적은 수가 거주하며, 2000년 추정 데이터에 따르면 각각 79.7%와 15.3%이다. 새로운 목적지 국가에는 남아프리카와 유럽으로 향하는 다양한 경유지가 포함된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이 지역 및 그 외 지역에 상당수의 난민과 망명 신청자를 배출했다. 이러한 수치는 2004년에 정점을 찍었는데, UNHCR에 따르면 콩고 민주 공화국 출신 난민은 46만 명 이상이었으며, 2008년에는 총 367,995명의 콩고 난민이 있었고 그중 68%가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거주하고 있었다.
2003년 이후 40만 명 이상의 콩고 이주민이 앙골라에서 추방되었다.
7.5. 언어
콩고 민주 공화국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다. 프랑스어는 콩고의 다양한 민족 집단 간의 의사소통을 용이하게 하는 링구아 프랑카로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진다. 2018년 OIF 보고서에 따르면, 4,900만 명의 콩고인(인구의 51%)이 프랑스어를 읽고 쓸 수 있었다. 2021년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74%가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어 프랑스어가 이 나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이다.
킨샤사에서는 2014년 인구의 67%가 프랑스어를 읽고 쓸 수 있었고, 68.5%가 프랑스어를 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2024년 기준으로 이 나라에는 약 1,200만 명의 프랑스어 원어민이 있다.
약 242개의 언어가 사용되며, 그중 4개 언어(키투바어(키콩고어), 링갈라어, 칠루바어, 스와힐리어)가 국어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이 언어들을 모국어로 사용하지만, 대부분의 인구는 자신의 민족 집단의 모국어 다음으로 이 언어들을 제2언어로 사용한다. 링갈라어는 벨기에 식민 통치 하에서 공공부대의 공식 언어였으며 오늘날까지도 군대의 주요 언어로 남아 있다. 최근 반란 이후 동부 지역 군대의 상당 부분은 지역 링구아 프랑카로서 경쟁하는 스와힐리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벨기에 통치 하에서 벨기에인들은 초등학교에서 4개의 국어 교육 및 사용을 제도화하여 유럽 식민지 시대에 현지 언어로 문해력을 갖춘 몇 안 되는 아프리카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독립 후 프랑스어가 모든 교육 수준에서 유일한 교육 언어가 되면서 역전되었다. 1975년 이후 4개의 국어가 초등 교육 첫 2년 동안 다시 도입되었고, 3학년부터는 프랑스어가 유일한 교육 언어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도시 지역의 많은 초등학교에서 1학년부터 프랑스어만을 사용한다. 포르투갈어는 콩고 학교에서 외국어로 가르친다. 프랑스어와의 어휘적 유사성과 음운론으로 인해 포르투GAL어는 사람들이 배우기 비교적 쉬운 언어이다. 콩고 민주 공화국의 약 175,000명의 포르투갈어 사용자 대부분은 앙골라 및 모잠비크 국외 거주자이다.
7.6. 종교


기독교는 콩고 민주 공화국의 주요 종교이다. 인구 보건 조사 프로그램이 2013년~2014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인구의 93.7%를 차지했다(가톨릭 29.7%, 개신교 26.8%, 기타 기독교 37.2%). 새로운 기독교 종교 운동인 킴방구주의는 2.8%의 신자를 보유했으며, 이슬람교도는 1%를 차지했다. 최근의 다른 추정치에 따르면 2010년 퓨 연구센터 추정치에 따르면 기독교가 인구의 95.8%를 차지하는 주요 종교이며, CIA 월드 팩트북은 이 수치를 95.9%로 보고하고 있다. 이슬람교 신자 비율은 1%에서 12% 사이로 다양하게 추정된다.
이 나라에는 약 3,500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으며, 6개의 대교구와 41개의 교구가 있다.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과대평가하기 어렵다. 샤츠버그는 이를 국가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진정한 국가 기관"이라고 불렀다. 가톨릭 교회 학교는 전국 초등학생의 60% 이상과 중등학생의 40% 이상을 교육했다. 교회는 병원, 학교, 진료소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농장, 목장, 상점, 장인 작업장 등 많은 교구 경제 사업체를 소유하고 관리한다.
62개의 개신교 교단이 콩고 그리스도 교회라는 이름 아래 연합되어 있다. 이는 콩고 민주 공화국 개신교 대부분을 포괄하기 때문에 종종 개신교회라고 불린다. 2,500만 명 이상의 신자를 보유한 이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개신교 단체 중 하나이다.
킴방구주의는 식민 정권에 위협으로 여겨져 벨기에에 의해 금지되었다. 공식적으로 "선지자 시몬 킴방구에 의한 지상의 그리스도 교회"인 킴방구주의는 약 300만 명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주로 중앙콩고주와 킨샤사의 바콩고족 사이에 분포한다.

이슬람교는 18세기부터 콩고 민주 공화국에 존재해 왔으며, 당시 동아프리카의 아랍 상인들이 상아 및 노예 무역을 위해 내륙으로 진출했다. 오늘날 퓨 연구센터에 따르면 이슬람교도는 콩고 인구의 약 1%를 차지한다. 대다수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다.
이 나라에 거주하는 바하이 신앙의 첫 번째 신자들은 1953년 우간다에서 왔다. 4년 후, 첫 번째 지역 행정 위원회가 선출되었다. 1970년에 국가 영적 총회(국가 행정 위원회)가 처음 선출되었다. 이 종교는 외국 정부의 왜곡된 표현으로 인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금지되었지만, 1980년대 말에 금지가 해제되었다. 2012년에는 이 나라에 국가 바하이 예배당을 건설할 계획이 발표되었다.
전통 종교는 일신교, 애니미즘, 생기론, 영혼 및 조상 숭배, 주술, 마법과 같은 개념을 구현하며 민족 집단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혼합 종교 분파는 종종 기독교 요소를 전통적인 신앙 및 의식과 결합하며 주류 교회에서는 기독교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고대 신앙의 새로운 변형이 널리 퍼졌으며, 특히 어린이와 노인에 대한 주술 혐의의 선두에 서 있는 미국에서 영감을 받은 오순절 교회들이 이를 주도하고 있다. 주술 혐의를 받은 어린이는 집과 가족으로부터 쫓겨나 거리에서 생활하게 되며, 이는 종종 이러한 어린이들에 대한 신체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콩고 어린이 신탁과 같은 거리 아동 지원 자선 단체가 있다. 콩고 어린이 신탁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는 루붐바시의 거리 아동들을 재결합시키는 킴빌리오이다. 이러한 어린이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는 enfants sorciers(어린이 마녀) 또는 enfants dits sorciers(주술 혐의를 받은 어린이)이다. 비종파 교회 조직들은 귀신 쫓기에 엄청난 비용을 청구함으로써 이러한 믿음을 이용하기 위해 형성되었다. 최근에는 불법화되었지만, 어린이들은 이러한 귀신 쫓기에서 자칭 예언자와 사제들의 손에 종종 폭력적인 학대를 당해왔다.
7.7. 교육

2014년, 15세에서 49세 사이 인구의 문해율은 전국 DHS 조사에 따르면 75.9%(남성 88.1%, 여성 63.8%)로 추정되었다. 교육 시스템은 3개의 정부 부처에 의해 관리된다: 초등, 중등 및 직업 교육부(MEPSP), 고등 및 대학 교육부(MESU), 사회 문제부(MAS). 콩고 헌법(2005년 콩고 헌법 제43조)에 따르면 초등 교육은 무상 의무 교육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제1차 및 제2차 콩고 전쟁의 결과로, 이 나라의 520만 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다. 내전이 끝난 이후 상황은 엄청나게 개선되어, 초등학교 등록 아동 수는 2002년 550만 명에서 2018년 1,68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중등학교 등록 아동 수는 2007년 280만 명에서 2015년 460만 명으로 증가했다고 유네스코는 밝혔다.
실제 학교 출석률도 최근 몇 년 동안 크게 향상되어, 2014년 초등학교 순 출석률은 82.4%로 추정되었다(6~11세 아동의 82.4%가 학교에 다녔으며, 남아는 83.4%, 여아는 80.6%였다).
7.8. 보건
콩고 민주 공화국의 병원에는 킨샤사 종합병원이 포함된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차드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영아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2011년 4월, GAVI의 지원을 통해 폐렴구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새로운 백신이 킨샤사 주변에 도입되었다. 2012년에는 15~49세 성인의 약 1.1%가 HIV/AIDS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말라리아와 황열은 문제이다. 2019년 5월, 콩고 민주 공화국의 에볼라 유행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콩고 민주 공화국의 황열 관련 사망자 발생률은 상대적으로 낮다. 세계보건기구(WHO)의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황열로 사망한 사람은 단 2명뿐이었다.
세계 은행 그룹에 따르면, 2016년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교통사고로 26,529명이 사망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의 산모 보건은 열악하다. 2010년 추정에 따르면 콩고 민주 공화국은 세계에서 17번째로 높은 산모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5세 미만 아동의 43.5%가 발육 부진 상태이다.
유엔 긴급 식량 구호 기관은 코로나19 이후 콩고 민주 공화국의 분쟁 격화와 상황 악화 속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 식량 계획의 데이터에 따르면, 2020년 콩고 인구의 10명 중 4명이 식량 불안정을 겪었고 약 1,560만 명이 잠재적인 기아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의 대기 오염 수준은 매우 건강에 해롭다. 2020년 콩고 민주 공화국의 연평균 대기 오염은 34.2 μg/m3로, 세계보건기구 PM2.5 지침(2021년 9월 설정된 5 μg/m3)의 거의 6.8배에 달했다. 이러한 오염 수준은 콩고 민주 공화국 시민의 평균 기대 수명을 거의 2.9년 단축시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콩고 민주 공화국에는 국가 대기 질 기준이 없다.
8. 문화

콩고 민주 공화국의 문화는 수많은 민족 집단의 다양성과 전국에 걸친 그들의 다양한 생활 방식을 반영한다. 해안의 콩고강 하구에서부터 내륙의 열대우림과 중앙의 사바나를 거쳐 극동의 인구 밀집 지역인 산악 지대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모습을 보인다. 19세기 후반 이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은 식민주의, 독립 투쟁, 모부투 시대의 정체,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제1차 및 제2차 콩고 전쟁으로 인해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콩고의 관습과 문화는 그 독자성을 많이 유지해 왔다. 2016년 기준 8,100만 명의 주민 대부분은 농촌에 거주한다.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30%는 서구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8.1. 문학
콩고 작가들은 콩고 민주 공화국 국민들 사이에 국가 의식을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문학을 사용한다. 프레더릭 캄벰바 야무상기에는 식민지 시대, 독립 투쟁 시기, 그리고 그 이후 콩고에서 자란 세대 간의 문학 작품을 쓴다. 야무상기에는 인터뷰에서 문학에서의 거리감을 느껴 이를 해결하고자 장편 소설 완전한 원(Full Circle)을 썼다고 말했는데, 이 소설은 책 초반에 콩고 및 다른 지역의 여러 집단 간 문화 차이를 느끼는 에마뉘엘이라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카탕가주 출신 작가인 라이스 네자 보네자는 갈등을 다루고 해결하는 방법으로 예술적 표현을 장려하기 위해 소설과 시를 썼다.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앙투안로저 볼람바의 깨진 사슬(1945년)은 전쟁 중 이 나라의 참혹함과 격동의 장면을 깊이 파고든 문체로 아프리카 문학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서전 작가인 레오니 아보는 남편이 당시 정치인이었던 피에르 물렐레였기 때문에 망명 생활을 비롯한 일상생활과 혁명 운동 당시의 모습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으며, 위험한 증언(1996년)은 그 일부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인지도가 높은 소설가로는 카마 시월 카만다가 있으며, 그는 이야기꾼이자 극작가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
8.2. 음악


콩고는 전통 리듬에 뿌리를 둔 풍부한 음악 유산을 가지고 있다. 콩고에서 가장 초기에 알려진 파트너 댄스 음악 형태는 마링가(Maringa)로, 현재의 콩고 공화국, 가봉 남부, 카빈다 일부를 포함하는 이전 로앙고 왕국 내에서 행해지던 콩고인 춤을 의미한다. 이 스타일은 1920년대~1930년대에 인기를 얻었으며, 레오폴드빌(현 킨샤사)에 "바 댄싱" 문화를 도입하여 베이스 드럼, 트라이앵글 역할을 하는 병, 아코디언과 같은 독특한 요소를 통합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쿠바 손 밴드의 영향으로 마링가가 "콩고 룸바"로 변형되었다. 종종 "룸바"로 잘못 표기된 Sexteto Habanero와 Trio Matamoros의 수입 음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앙투안 카송고, 폴 캄바, 앙리 보완, 웬도 콜로소이, 프랑코 루암보, 르 그랑 칼레, 비키 롱곰바, 니코 카산다, 타부 레이 로슈로, 파파 노엘 네둘레와 같은 예술가들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이 스타일을 진정으로 대중화하고 상당한 기여를 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콩고 룸바에서 발전한 도시 댄스 음악 스타일인 수쿠스가 등장했다. 수쿠스는 몽고족 리듬의 영향을 반영하는 에콘다 사카데와 오테텔라족 민족 배경의 골반춤 댄스 동작을 모방한 모코뇨뇽과 같은 다양한 파생 장르로 이어졌다. "르 사푀르"인 파파 윔바의 지도 아래 같은 수쿠스는 항상 값비싼 디자이너 옷을 입은 젊은 남성 세대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들은 콩고 음악의 4세대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대부분 이전의 저명한 밴드 웬지 무지카 출신이다.
모부투 치하의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음악가들이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 잠비아,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유럽, 아시아로 대거 이주하면서 콩고 도시 음악의 확산이 확대되었다. 특히 4인조 Ry-Co Jazz는 콩고 음악을 세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서아프리카, 카리브해, 프랑스를 순회 공연했다. 1980년대까지 많은 콩고 음악가들이 유럽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이는 그들의 음악적 기량을 전 세계적으로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콩고 리드 기타리스트들은 수요가 많은 상품이 되었고, 전 세계 밴드들이 자신들의 작곡에 콩고 풍미를 불어넣거나 복잡한 콩고 기타 기교를 배우고 싶어 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콩고 룸바와 수쿠스에서 영감을 받은 빠르고 엉덩이를 흔드는 댄스 음악인 은돔볼로가 등장했다. 이 장르는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대륙에서 광범위한 인기를 얻었으며, 파파 윔바, 코피 올로미데, 웨라송, 아윌로 롱옴바, 카르티에 라탱 인터내셔널, 제네랄 데파오, 아우루스 마벨레, 엑스트라 무지카, 웬지 무지카, 웬지 무지카 메종 메르, 팔리 이푸파와 같은 음악가들이 그 발전과 국제 무대에 크게 기여했다.
콩고 대중음악은 이러한 아메리카 대륙의 리듬뿐만 아니라 교회 음악, 가나의 하일라이프, 나아가 콩고 전통 음악까지 받아들여 발전했다. 1969년 파파 윔바를 중심으로 자이코 랑가 랑가가 결성된 이후의 대중음악은 쿠바 음악 모방을 넘어 자이르 음악을 형성했고, 그 흐름을 타고 자이르 대중음악의 주요 장르로서 여러 나라에 명성을 떨친 룸바 록이나 링갈라 팝이라는 장르가 탄생했다. 또한 그 곁에서 아프리카 고유의 룸바 및 팝 댄스 범주로서 콩고 룸바가 새롭게 창설되었고, 콩고 룸바는 이후 콩고 민주 공화국과 콩고 공화국의 음악 장르 중 하나로 확립되어 2021년 12월 무형문화유산의 하나로 등록되었다. 링갈라 팝 음악가로는 자이코 랑가 랑가 외에 투 자이나, 타부 레이, 오케스트르 베베, 칸다 봉고만, 샘 망과나 등의 이름이 있다. 그 외에도 북동부 이투리숲(Ituri Rainforest)의 피그미족(밤부티족)에게는 독자적인 음악 문화가 존재한다.
8.3. 미디어
콩고 민주 공화국의 신문에는 르아브니르 (L'Avenir라브니르프랑스어), 라디오 텔레비지옹 음왕가자, La Conscience라 콩시앙스프랑스어, L'Observateur (L'Observateur롭세르바퇴르프랑스어), 르 파르, 르 포탕시엘, 르 소프트, 르콩골레.CD 등이 있으며, 이 중 르콩골레.CD는 웹 기반 일간지이다. 콩고 국영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RTNC)은 콩고 민주 공화국의 국영 방송사이다. RTNC는 현재 링갈라어와 프랑스어로 방송한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헌법에서 언론과 보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지만, 정작 정부는 이 권리의 실행을 제한하고 있다. 또한 언론인에 대한 부당 체포, 살해, 기타 괴롭힘이 빈번하게 보고되어 현재도 문제로 남아 있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서 2009년 콩고 민주 공화국은 175개국 중 146위를 기록했다.
8.4. 요리
콩고 민주 공화국의 요리는 카사바, 푸푸, 쌀, 질경이, 감자 등을 주식으로 하며, 종종 고기, 생선, 야채와 함께 제공된다. 닭고기 모ambe는 땅콩버터, 토마토, 양파, 향신료로 만든 닭고기 스튜로 국가 요리로 간주된다. 염소고기, 생선(특히 틸라피아), 곤충(예: 애벌레)도 흔히 소비된다. 열대 과일과 야채가 풍부하며, 팜유가 요리에 널리 사용된다. 지역별로 특색 있는 요리가 있으며, 강가에서는 생선 요리가, 내륙에서는 사냥 고기 요리가 발달했다.
8.5. 스포츠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는 축구, 농구, 야구, 럭비 등 많은 스포츠가 행해진다. 스포츠는 전국 여러 경기장에서 진행되며, 스타드 프레데릭 키바사 말리바도 그중 하나이다. 자이르 시절에는 1974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
국제적으로 이 나라는 특히 프로 농구 NBA 선수들과 축구 선수들로 유명하다. 디켐베 무톰보는 역대 최고의 아프리카 농구 선수 중 한 명이다. 무톰보는 고국에서의 인도주의 프로젝트로 잘 알려져 있다. 비스마크 비욤보, 크리스티앙 에옝가, 조나단 쿠밍가, 에마뉘엘 무디아이는 농구에서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다른 선수들이다. 로멜루 루카쿠, 야니크 볼라시, 듀메르시 음보카니를 포함한 여러 콩고 선수 및 콩고계 선수들이 세계 축구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축구 토너먼트에서 두 차례 우승했다.
콩고 민주 공화국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은 마지막으로 2021년 아프리카 여자 배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 자격을 얻었다. 이 나라는 여자부와 남자부 모두 2018년~2020년 CAVB 비치발리볼 컨티넨털컵에 출전한 비치발리볼 국가대표팀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