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나미비아 공화국(Republic of Namibia리퍼블릭 오브 너미비어영어, Republiek van Namibië레퓌블릭 판 나미비어아프리칸스어, Republik Namibia레푸블리크 나미비아독일어)은 아프리카 남서부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는 빈트후크이다. 북쪽으로 앙골라와 잠비아, 동쪽으로 보츠와나, 남쪽과 동쪽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국경을 접하며, 서쪽은 대서양에 면한다. 짐바브웨와는 직접 국경을 접하지 않으나, 잠베지강을 사이에 두고 약 200 m 거리에 있다. 과거 독일의 식민지였으며,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위임 통치를 거쳐 나미비아 독립 전쟁 끝에 1990년 3월 21일 독립을 달성했다. 국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 중 하나인 나미브 사막에서 유래했다.
나미비아는 건조한 기후가 특징이며, 선사 시대부터 산족, 다마라족, 나마족 등이 거주해왔다. 14세기경 반투족이 이주해왔으며, 1884년 독일 제국의 보호령이 되어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로 불렸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남아프리카 연방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시행되었다. 1966년 유엔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통치권을 종결시키고 직접 관리하기로 했으나, 남아공은 사실상의 통치를 계속했다. 1973년 유엔은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를 나미비아 국민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로 인정했다. 오랜 독립 투쟁 끝에 1990년 독립하였으며, 1994년에는 월비스베이와 펭귄 제도가 나미비아로 반환되었다.
나미비아는 대통령 중심제의 안정적인 다당제 민주주의 국가이다. 경제는 광업(특히 다이아몬드, 우라늄), 농업, 관광업이 주축을 이룬다. 국토 면적은 82.56 만 km2이며, 2023년 인구 조사 기준으로 약 302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여, 몽골 다음으로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낮은 국가 중 하나이다(km²당 약 3.7명). 독립 이후 상당한 GDP 성장을 이루었으나, 빈곤과 소득 불평등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나미비아는 유엔,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 아프리카 연합(AU), 영연방의 회원국이다.
2. 역사
나미비아는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민족의 거주와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 그리고 독립 투쟁이라는 복잡한 역사를 거쳐왔다. 이 과정에서 국명의 유래, 식민 시대 이전의 토착민 사회, 독일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통치, 그리고 독립 이후의 발전 과정은 나미비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이다.
2.1. 어원
나미비아라는 국명은 나미브 사막에서 유래했다. 나미브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나미브(Namib)'라는 단어 자체는 이 지역 토착민인 나마족의 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광대한 장소" 또는 "텅 빈 공간"을 의미한다. 또한, 산족의 언어로는 "은신처"를 뜻한다는 설도 있다. 현대 나미비아의 국명은 독립운동가였던 음부룸바 케리나가 처음 제안한 '나미브 공화국(Republic of Namib리퍼블릭 오브 나미브영어)'에서 비롯되었다.
1990년 독립 이전까지 나미비아 영토는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독일의 식민 지배 시기에는 '독일령 남서아프리카'(Deutsch-Südwestafrika도이치-쥐트베스트아프리카독일어)로 알려졌으며,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통치하에서는 '남서아프리카'(South West Africa사우스 웨스트 아프리카영어)로 불렸다. 이러한 명칭 변화는 각각 독일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의한 식민 지배의 역사를 반영한다.
2.2. 식민 시대 이전

나미비아의 건조한 땅에는 선사 시대부터 산족, 다마라족, 나마족 등이 거주해왔다. 이들 코이산족은 수천 년 동안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유지했는데, 코이코이족은 목축을, 산족은 수렵 채집 생활을 영위했다. 14세기경에는 중앙아프리카로부터 반투족의 대이동의 일환으로 반투족 계열의 민족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16세기부터 17세기 사이에는 헤레로족, 다마라족, 카방고족 등이 정착했다.
18세기 말부터는 케이프 식민지에서 온 오를람인들이 오렌지강을 건너 현재의 나미비아 남부 지역으로 이동해왔다. 이들과 나마족 유목민과의 만남은 대체로 평화적이었으며, 오를람인과 동행한 선교사들도 환영받았다. 그러나 오를람인들이 북쪽으로 더 이동하면서 빈트후크, 고바비스, 오카한자 등지에서 헤레로족과 충돌하게 되었고, 이는 1880년 나마-헤레로 전쟁으로 이어졌다.
유럽인 중 최초로 이 지역에 상륙하여 탐험한 이들은 1485년 디오고 캉과 1486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등 포르투갈 항해사들이었으나, 포르투갈은 이 지역을 영유하려 하지 않았다. 19세기 들어 독일과 스웨덴 출신의 상인과 정착민들이 주로 들어왔다. 1870년에는 핀란드 선교사들이 나미비아 북부로 와 오밤보족과 카방고족에게 루터교를 전파했다. 19세기 말에는 보어인들인 도르슬란트 트레커(Dorsland Trekkers)가 트란스발에서 앙골라로 가는 길에 이 지역을 통과했으며, 일부는 여정을 계속하는 대신 나미비아에 정착하기도 했다.
1858년에는 케이프 식민지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한 나미비아 지역의 여러 부족들이 욘커 아프리카너의 지도 아래 호아차나스 평화 조약(Hoachanas Peace Treaty)을 체결하여 외부 식민 세력에 공동으로 대항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으나, 그 효력은 미미했다. 1878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케이프 식민지는 항구 도시 월비스베이와 해안의 펭귄 제도를 병합했고, 이 지역들은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 결성될 때 그 일부가 되었다.
2.3. 독일의 식민 통치
나미비아는 1884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치하의 독일 제국에 의해 영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식민지화되었으며, '독일령 남서아프리카'(Deutsch-Südwestafrika도이치-쥐트베스트아프리카독일어)로 불렸다. 독일 상인 아돌프 뤼데리츠가 1883년 현지 부족장으로부터 해안 지역의 땅을 구매한 것이 식민지화의 발판이 되었다.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 총독이 파견한 팔그레이브 위원회는 천연 심해항인 월비스베이만이 점령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 지역을 영국령 남아프리카의 케이프주에 병합시켰다.
독일의 식민 통치는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토지 강탈로 점철되었다. 독일에서 파견된 행정관들은 "문명화의 사명"과 상업적 이익을 내세워 식민지화를 강행했다. 이에 맞서 1897년에는 소역병 유행으로 가축의 약 95%가 폐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은 원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독일 식민 당국은 이에 대응하여 '레드 라인(Red Line)'으로 알려진 수의학적 방역선을 설치했는데, 이는 1907년 최초의 경찰 구역 경계로 이어졌다.
2.3.1. 헤레로·나마 집단학살

1904년부터 1907년까지 헤레로족과 나마족은 무자비한 독일 정착민들에 대항하여 무력 봉기를 일으켰다 (헤레로 전쟁). 사무엘 마하레로가 이끄는 헤레로족의 봉기를 시작으로, 헨드릭 비트부이가 이끄는 나마족도 합세했다. 이에 독일 식민 정부는 원주민 말살을 명령하며 계산된 보복 작전을 감행했다. 독일군 사령관 로타르 폰 트로타 장군은 1904년 10월 2일 헤레로족에 대한 절멸령을 내렸고, 1905년 4월 21일에는 나마족에 대해서도 유사한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로 불리는 헤레로·나마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독일군은 약 10,000명의 나마족(전체 인구의 약 절반)과 약 65,000명의 헤레로족(전체 인구의 약 80%)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생존자들은 구금에서 풀려난 후에도 재산 몰수, 추방, 강제 노동, 인종 분리 및 차별 정책에 시달렸는데, 이는 여러 면에서 194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수립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인은 소위 원주민 보호구역에 감금되었고, 이는 1949년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 통치 하에서 "홈랜드"(반투스탄)로 전환되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나미비아에서의 헤레로족 말살이 나치의 홀로코스트 모델이 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독일 통치 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은 독립 나미비아의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오늘날 독일과의 관계에서도 그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다.
2004년 독일 개발원조부 장관이 나미비아 학살에 대해 사과했으나, 독일 정부는 이 사과와 거리를 두었다. 2021년에 이르러서야 독일 정부는 이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30년간 11.00 억 EUR를 지역사회 원조금으로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2.4.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위임 통치와 점령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루이스 보타 장군이 이끄는 남아프리카 연방군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를 점령하고 독일 식민 행정부를 축출했다. 전쟁이 끝나고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면서, 남서아프리카는 남아프리카 연방의 통치하에 남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국제 연맹의 위임통치령으로서 1990년까지 지속되었다. 위임 통치 제도는 옛 독일 및 오스만 제국 영토의 연합국 병합을 주장하는 측과, 이들 영토가 자치 능력을 갖출 때까지 국제 신탁 통치에 두자는 제안 사이의 타협안으로 형성되었다. 이는 남아프리카 정부가 남서아프리카 주민들이 정치적 자결권을 가질 준비가 될 때까지 이 지역을 관리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 위임 통치를 사실상의 병합으로 해석하고 남서아프리카의 미래 자치를 위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1945년 국제 연합(UN)이 창설되면서 국제 연맹은 공식적으로 대체되었고, 옛 국제 연맹 위임 통치령은 신탁 통치 제도로 전환될 예정이었다. 유엔 헌장 제77조는 유엔 신탁 통치가 "현재 위임 통치 하에 있는 영토에 적용된다"고 명시했다. 유엔은 모든 옛 국제 연맹 위임 통치령을 독립을 준비시키기 위해 신탁 통치 이사회에 넘길 것을 요청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남서아프리카의 공식 병합 허가를 유엔에 요청했으나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유엔 총회가 이 제안을 거부하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그 의견을 무시하고 영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유엔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는 이 문제를 국제 사법 재판소(ICJ)에 회부했고, ICJ는 1949년부터 1966년까지 남아프리카 통치의 합법성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했다.


헨드릭 비트부이(왼쪽)와 사무엘 마하레로(오른쪽)는 독일 식민 통치에 맞선 저명한 지도자들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40년대 후반부터 남서아프리카에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 분리 및 차별 체제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흑인 남서아프리카인들은 통행법, 통금 시간, 그리고 이동을 제한하는 수많은 거주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개발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인접한 영토 남부 지역, 즉 "경찰 구역(Police Zone)"으로 알려진 곳에 집중되었으며, 이곳에 대부분의 주요 정착지와 상업 경제 활동이 위치했다. 경찰 구역 밖에서는 원주민들이 이론적으로 자치적인 부족 홈랜드(반투스탄)에 제한되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 아프리카의 탈식민지화 가속화와 남아있는 식민 강국들에 대한 식민지 자결권 부여 압력 증가는 남서아프리카에서 신생 민족주의 정당들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남서아프리카 국민연합(SWANU)과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와 같은 운동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위임 통치 공식 종료와 영토 독립을 주장했다. 1966년, ICJ가 남아프리카 통치 문제에 대한 법적 지위가 없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결을 내린 후, SWAPO는 무장 봉기를 시작했고, 이는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으로 알려진 더 넓은 지역 분쟁의 일부로 확대되었다.
1971년, 나미비아 계약직 노동자들은 계약 시스템에 반대하고 독립을 지지하는 총파업을 주도했다. 파업 노동자 중 일부는 나중에 SWAPO의 나미비아 인민해방군(PLAN)에 합류하여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에 참여했다.
2.5. 독립 과정

SWAPO의 무장 투쟁이 격화되면서, 국제 사회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병합 주장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갔다. 유엔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남서아프리카 원주민의 도덕적, 물질적 복지를 보장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위임 통치권을 스스로 포기했다고 선언했다. 1968년 6월 12일, 유엔 총회는 남서아프리카 주민들의 염원에 따라 영토 명칭을 나미비아로 변경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969년 8월에 채택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269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나미비아 계속 점령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결정을 기리기 위해 SWAPO의 군사 조직은 나미비아 인민해방군(PLAN)으로 개칭되었다.
나미비아는 PLAN 봉기 후반기 동안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냉전 대리 분쟁의 여러 발화점 중 하나가 되었다. 반군은 무기를 찾고 군사 훈련을 위해 소련에 신병을 보냈다. PLAN의 전쟁 노력이 탄력을 받으면서 소련과 쿠바와 같은 동조 국가들은 지원을 계속 늘려 반군을 직접 훈련시키기 위해 고문단을 파견하고 더 많은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다. 소련, 앙골라, 쿠바의 군사 지원에 의존했던 SWAPO 지도부는 1975년까지 이 운동을 사회주의 진영 내에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실질적인 동맹은 SWAPO를 소련의 대리인으로 보는 외부 인식을 강화시켰으며,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미국에서 냉전 수사학을 지배했다. 소련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서방의 지역 동맹국으로 보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SWAPO를 지원했다.

전쟁 피로감 증가와 강대국 간 긴장 완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앙골라, 쿠바가 소련과 미국의 압력 하에 삼국 협정에 동의하도록 강요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쿠바군의 역내 철수와 앙골라의 PLAN 지원 중단 약속을 대가로 나미비아 독립을 수락했다. PLAN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88년 8월 비공식 휴전에 합의했고, 나미비아 평화 과정 감시 및 난민 귀환 감독을 위해 유엔 나미비아 과도 지원단(UNTAG)이 결성되었다. 이 휴전은 1989년 3월 PLAN이 UNTAG의 지시를 오해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는 마지막 영토 침공 후 깨졌다. 이후 UNTAG에 의해 무장 해제 및 동원 해제될 때까지 반군을 앙골라의 외부 기지에 국한시키는 조건으로 새로운 휴전이 부과되었다.
11개월간의 과도기 마지막에는 마지막 남아프리카 군대가 나미비아에서 철수했고, 모든 정치범이 사면되었으며, 인종 차별 법규가 폐지되었고, 42,000명의 나미비아 난민이 집으로 돌아왔다. 유권자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97% 이상이 보통선거 하에 치러진 국가 최초의 의회 선거에 참여했다. 유엔 계획에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외국 선거 감시단의 감독이 포함되었다. SWAPO는 대중 투표의 57%를 얻어 제헌 의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이로써 당은 41석을 확보했지만, 자체적으로 헌법을 초안할 수 있는 3분의 2 다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나미비아 헌법은 1990년 2월에 채택되었다. 이 헌법은 인권 보호와 사유 재산에 대한 국가 수용 보상을 포함했으며, 독립적인 사법부, 입법부, 행정 대통령제를 수립했다 (제헌 의회는 국회가 됨). 나미비아는 1990년 3월 21일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샘 누조마는 전 달 감옥에서 석방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와 20명의 국가 원수를 포함한 147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기념식에서 나미비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최초의 다인종 선거가 있기 직전에 월비스베이가 나미비아에 반환되었다.
2.6. 독립 이후
나미비아는 독립 이후 백인 소수 아파르트헤이트 통치에서 의회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완료했다. 다당제 민주주의가 도입되어 유지되고 있으며, 지방, 지역 및 전국 선거가 정기적으로 실시된다. 여러 등록 정당이 활동하며 국회에 진출해 있지만, SWAPO는 독립 이후 모든 선거에서 승리했다. 샘 누조마 대통령의 15년 통치에서 후임자인 히피케푸니에 포함바 대통령으로의 2005년 정권 이양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독립 이후 나미비아 정부는 국민 화해 정책을 추진해왔다. 해방 전쟁 중 양측에서 싸운 사람들에 대한 사면을 발표했다. 앙골라 내전이 확산되어 나미비아 북부에 거주하는 나미비아인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98년, 나미비아 국방군(NDF) 병력이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 파견대의 일원으로 콩고 민주 공화국에 파견되었다. 1999년, 중앙 정부는 북동부 카프리비 스트립에서의 분리 독립 시도를 진압했다. 카프리비 분쟁은 미샤케 무용고가 이끄는 반군 단체인 카프리비 해방군(CLA)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카프리비 스트립이 분리 독립하여 자체 사회를 형성하기를 원했다.
2007년에는 트베이휄폰테인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암각화 집중지 중 하나인 선사 유적지로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4년 12월, 집권당 SWAPO의 후보인 하게 게인고브 총리가 대통령 선거에서 87%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그의 전임자인 히피케푸니에 포함바 대통령(역시 SWAPO 소속)은 헌법상 허용된 최대 임기인 두 번의 임기를 마쳤다. 2019년 12월, 하게 게인고브 대통령은 재선되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으며, 56.3%의 득표율을 얻었다. 2024년 2월 4일, 하게 게인고브 대통령이 사망하자 낭골로 음붐바 부통령이 즉시 나미비아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2025년 3월에 끝나는 고인의 남은 임기를 수행하게 되었다. SWAPO의 첫 여성 대통령 후보인 네툼보 난디-니다이트와는 2024년 선거에서 57%의 득표율로 당선자로 선언되었다.
3. 지리
나미비아는 남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대서양과 접하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은 건조하거나 반건조 기후를 나타내며, 다양한 지형적 특징을 보인다. 주요 지형으로는 중앙 고원, 나미브 사막, 대단층 절벽, 부시벨트, 칼라하리 사막 등이 있으며, 각 지역은 독특한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3.1. 지형


나미비아의 국토 면적은 82.56 만 km2로, 세계에서 34번째로 큰 나라이다 (베네수엘라 다음). 대부분 남위 17도에서 29도 사이(일부 작은 지역은 17도 북쪽에 위치), 동경 11도에서 26도 사이에 위치한다. 나미브 사막과 칼라하리 사막 사이에 위치하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강수량이 가장 적은 나라이다.
나미비아의 지형은 일반적으로 다섯 개의 주요 지리적 지역으로 나뉜다. 각 지역은 고유한 비생물적 조건과 식생을 가지고 있으며, 지역 간 약간의 변이와 중첩이 존재한다:
1. 중앙 고원 (Central Plateau):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스켈레톤 코스트, 남서쪽으로는 나미브 사막과 해안 평야, 남쪽으로는 오렌지강, 동쪽으로는 칼라하리 사막과 경계를 이룬다. 중앙 고원에는 나미비아 최고봉인 해발 2606 m의 쾨니히슈타인 산이 있다.
2. 나미브 사막 (Namib Desert): 나미비아 전체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광대한 초건조 역암 평야와 모래 언덕 지역이다. 폭은 100 km에서 200 km 사이로 다양하다. 나미브 사막 내에는 북쪽의 스켈레톤 코스트와 카오코벨트, 중앙 해안을 따라 광활한 나미브 모래 바다가 포함된다. 나미비아의 해안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 중 하나이며, 강한 육풍으로 인해 형성된 모래 언덕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대서양의 차가운 물이 아프리카의 뜨거운 기후와 만나는 지점에 해안선이 위치하기 때문에 해안을 따라 종종 극도로 짙은 안개가 형성된다. 해안 근처에는 모래 언덕에 초목이 자라는 지역도 있다.
3. 대단층 절벽 (Great Escarpment): 급격하게 해발 2000 m 이상으로 솟아오른다. 평균 기온과 기온 범위는 차가운 대서양에서 내륙으로 갈수록 증가하며, 잔존하는 해안 안개는 서서히 사라진다. 이 지역은 암석이 많고 토양이 척박하지만, 나미브 사막보다는 훨씬 생산적이다. 여름 바람이 단층 절벽을 넘으면서 수분이 강수로 추출된다.
4. 부시벨트 (Bushveld): 나미비아 북동부, 앙골라 국경과 카프리비 스트립 지역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연평균 약 400 mm의 강수량으로, 전국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은 비가 내린다. 지형은 대체로 평탄하고 토양은 모래질이어서 물을 보유하고 농업을 지원하는 능력이 제한적이다. 이곳에는 퀴버나무 숲 등이 있다.
5. 칼라하리 사막 (Kalahari Desert):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보츠와나까지 이어지는 건조 지역으로, 나미비아의 잘 알려진 지리적 특징 중 하나이다. 칼라하리는 일반적으로 사막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푸르고 기술적으로는 사막이 아닌 지역을 포함하여 다양한 국지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다육 카루(Succulent Karoo) 지역에는 5,000종 이상의 식물이 서식하며, 그중 거의 절반이 고유종이다. 전 세계 다육식물의 약 10%가 카루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높은 생산성과 고유성은 비교적 안정적인 강수량 때문일 수 있다.
나미비아에는 13개의 도시(시 자치체)와 26개의 마을(읍 자치체)이 있다. 수도인 빈트후크는 나미비아에서 단연 가장 큰 도시이다. 2023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주요 도시는 빈트후크(486,169명), 룬두(118,625명), 월비스베이(102,704명), 스바코프문트(75,921명), 오샤카티(58,696명) 등이다.
3.2. 기후

나미비아는 남위 17도에서 25도 사이에 걸쳐 있으며, 기후학적으로 아열대 고기압대의 범위에 속한다. 전반적인 기후는 건조하며, 아습윤 기후(연평균 강수량 500 mm 이상)에서 반건조 기후( 300 mm~500 mm, 대부분의 물 없는 칼라하리 사막 포함) 및 건조 기후( 150 mm~300 mm, 이 세 지역은 서쪽 대단층 절벽의 내륙)를 거쳐 초건조 해안 평야(강수량 100 mm 미만)로 점차 건조해진다. 최고 기온은 전체 지역의 고도에 의해 제한되며, 극남부의 밤바트, 나미비아와 같은 곳에서만 40 °C 이상의 최고 기온이 기록된다.
일반적으로 아열대 고기압대는 맑은 날이 잦아 연간 300일 이상 햇볕이 내리쬔다. 열대 지방의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남회귀선이 국토를 거의 절반으로 가른다. 겨울(6월~8월)은 대체로 건조하다. 두 번의 우기는 여름에 발생하는데, 9월에서 11월 사이의 소우기와 2월에서 4월 사이의 대우기가 있다. 습도는 낮고 평균 강수량은 해안 사막의 거의 0mm에서 카프리비 스트립의 600 mm 이상까지 다양하다. 강수량은 변동성이 매우 크며 가뭄이 잦다. 2019년 5월 나미비아는 가뭄에 대응하여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2019년 10월에는 6개월 연장했다. 2024년에는 수십 년 만의 최악의 가뭄에 직면하여 야생동물 개체 수 조절에 나서기도 했다.
해안 지역의 날씨와 기후는 대서양의 차갑고 북쪽으로 흐르는 벵겔라 해류의 지배를 받으며, 이로 인해 강수량이 매우 적고(연간 50 mm 이하), 짙은 안개가 자주 끼며, 전국 다른 지역보다 전반적으로 기온이 낮다. 겨울에는 때때로 '베르크빈트'(독일어로 "산바람") 또는 '오스웨어'(아프리칸스어로 "동쪽 날씨")라는 조건이 발생하는데, 이는 내륙에서 해안으로 부는 덥고 건조한 바람이다. 해안 뒤쪽 지역이 사막이기 때문에 이 바람은 모래폭풍으로 발전하여 대서양에 모래 퇴적물을 남기며, 이는 위성 사진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중앙 고원과 칼라하리 지역은 일교차가 커서 최대 30 °C에 이른다.
북부 지역의 연례 계절성 홍수인 '에푼자(Efundja)'는 종종 기반 시설 피해뿐만 아니라 인명 피해도 야기한다. 이 홍수를 유발하는 비는 앙골라에서 시작되어 나미비아의 쿠벨라이-에토샤 분지로 흘러 들어가 그곳의 '오샤나'(오시밤보어: 범람원)를 채운다. 2011년 3월에 발생한 최악의 홍수로 21,0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3.3. 수자원
나미비아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건조한 국가로 지하수에 크게 의존한다. 연평균 강수량은 약 350 mm이며, 가장 많은 비가 내리는 곳은 북동부의 카프리비 스트립(연간 약 600 mm)이고 서쪽과 남서쪽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줄어들어 해안가에서는 연간 50 mm 이하로 감소한다. 유일한 영구 강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앙골라, 잠비아와의 국경 및 카프리비 스트립의 보츠와나와의 짧은 국경에서만 발견된다. 내륙에서는 이례적인 강우 후 강이 범람하는 여름철에만 지표수를 이용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이러한 계절성 홍수와 유출수를 저장하는 몇몇 대형 저수지에 지표수가 제한적으로 존재한다. 영구 강 근처에 살지 않거나 저수지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하수에 의존한다. 광업, 농업, 관광업과 같이 양호한 지표수원에서 멀리 떨어진 고립된 공동체와 경제 활동조차도 국토의 거의 80%에서 지하수로 공급받을 수 있다.
지난 세기 동안 나미비아에서는 10만 개 이상의 시추공이 뚫렸으며, 이 중 3분의 1은 물이 나오지 않았다. 2012년 앙골라-나미비아 국경 양쪽에 걸쳐 있는 오항궤나 II(Ohangwena II) 대수층이 발견되었다. 이 대수층은 현재(2018년) 소비율로 북부 지역 80만 명의 인구에게 400년 동안 물을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나미비아가 약 7720 km3의 지하수를 보유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나미비아의 하수 처리 프로젝트는 시민들에게 안전한 식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연간 생산성을 6% 향상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잔류 염소 처리, 오존 처리, 초미세 여과막 등 최첨단 "다중 장벽" 기술을 사용하여 모든 오염 물질과 불순물을 제거한다. 또한 공정 전반에 걸쳐 엄격한 생물학적 모니터링 방법을 사용하여 고품질의 안전한 식수를 보장한다.
2023년 6월 8일, 나미비아는 남부 아프리카 국가 중 최초이자 아프리카에서 8번째로 국경을 초월하는 수로와 국제 호수의 보호 및 사용에 관한 협약(유엔 물 협약)에 가입했다.
3.4. 야생동물 및 자연보전

나미비아는 헌법에 야생동물 보전과 천연자원 보호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헌법 제95조는 "국가는 생태계, 필수 생태 과정 및 나미비아의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고, 현재와 미래의 모든 나미비아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있는 천연자원을 지속 가능한 기준으로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국제 정책을 채택하여 국민의 복지를 적극적으로 증진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993년, 나미비아 신생 정부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유한 환경 생활(LIFE) 프로젝트를 통해 자금을 지원받았다. 환경관광부는 USAID, 멸종위기 야생동물 신탁기금, 세계자연기금(WWF), 캐나다 대사 기금과 같은 기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지역사회 기반 자연자원 관리(CBNRM) 지원 구조를 형성한다. 이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는 지역사회에 야생동물 관리 및 관광 권한을 부여하여 지속 가능한 천연자원 관리를 촉진하는 것이다.
나미비아에는 아프리카들개, 딕딕,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한 검은코뿔소 등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한다. 포유류 200종, 조류 645종, 어류 115종이 보고되어 있다.
주요 국립공원으로는 에토샤 국립공원, 나미브-나우클루프트 국립공원, 스켈레톤 코스트 국립공원 등이 있으며, 이들 보호구역은 다양한 생물종의 서식지이자 생태 관광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4. 정치

나미비아는 단일 국가이며, 준대통령제 대의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나미비아의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선출되며,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다. 정부의 모든 구성원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입법부에 책임을 진다.
나미비아 헌법은 국가 정부 기관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 행정부: 행정권은 대통령과 내각에 의해 행사된다.
- 입법부: 나미비아는 양원제 의회를 가지며, 국민의회가 하원 역할을 하고, 국가평의회가 상원 역할을 한다.
- 사법부: 나미비아는 국가의 이름으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법원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헌법은 나미비아 정부를 위한 다당제를 구상했지만, 1990년 독립 이후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당이 일당우위제를 유지해왔다. 2023년 V-Dem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나미비아는 전 세계 선거 민주주의 국가 중 66위, 아프리카 선거 민주주의 국가 중 8위를 차지했다.
4.1. 정부 구조
나미비아는 대통령 중심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권력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분립되어 있다.
- 대통령: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으로, 국민 직접 선거를 통해 5년 임기로 선출된다. 현재 대통령은 낭골로 음붐바이다. 대통령은 총리와 각료를 임명하고 국군통수권을 가진다.
- 행정부: 대통령이 이끄는 내각으로 구성되며, 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고 행정 각부를 총괄한다. 현 총리는 사라 쿠공겔와이다.
- 입법부: 양원제로, 상원인 국가평의회(National Council)와 하원인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로 구성된다.
- 국민의회: 총 104석으로, 96석은 비례대표제로 선출되고 8석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임기는 5년이다. 법률안 심의 및 의결, 예산 승인 등의 기능을 수행한다.
- 국가평의회: 총 42석으로, 14개 주에서 각 3명씩 선출된다. 임기는 5년이다. 국민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을 검토하고 수정 제안을 할 수 있다.
- 사법부: 대법원(Supreme Court), 고등법원(High Court), 하급법원(Magistrate Courts)으로 구성되며, 헌법에 따라 독립성을 보장받는다. 대법원장은 페터 시부테이다.
나미비아는 독립 이후 SWAPO가 계속 집권하고 있으나, 형식적으로는 다당제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야당으로는 대중민주운동(PDM, 구 민주 투른할레 동맹), 토지 없는 인민 운동(LPM) 등이 있다. 선거는 정기적으로 실시되며, 국제 사회로부터 대체로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4.2. 행정 구역

나미비아는 14개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주들은 다시 121개 선거구(Constituency)로 나뉜다. 나미비아의 행정 구역은 '경계획정위원회'에 의해 제안되고 국민의회의 승인을 받는다. 건국 이후 4개의 경계획정위원회가 활동했으며, 마지막 위원회는 2013년 알프레드 시볼레카 판사 주재 하에 이루어졌다. 가장 도시화되고 경제적으로 활발한 주는 수도 빈트후크가 있는 코마스주와 월비스베이 및 스바코프문트가 있는 에롱고주이다.
2023년 나미비아 인구 및 주택 조사에 따른 각 주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주 | 인구 (2023년) | km2당 인구 | 평균 가구원 수 |
---|---|---|---|
코마스 | 494,605 | 13.4 | 3.3 |
오항궤나 | 337,729 | 31.5 | 4.8 |
오무사티 | 316,671 | 11.9 | 4.2 |
오시코토 | 257,302 | 6.7 | 4.1 |
에롱고 | 240,206 | 3.8 | 3.1 |
오샤나 | 230,801 | 26.7 | 3.7 |
오초존주파 | 220,811 | 2.1 | 3.6 |
카방고 동부 | 218,421 | 9.1 | 5.3 |
잠베지 | 142,373 | 9.7 | 3.7 |
카방고 서부 | 123,266 | 5.0 | 5.5 |
쿠네네 | 120,762 | 1.0 | 3.8 |
하르다프 | 106,680 | 1.0 | 3.6 |
ǁ카라스 | 109,893 | 0.7 | 3.1 |
오마헤케 | 102,881 | 1.2 | 3.3 |
주 의원은 각 선거구 주민들의 비밀 투표(지방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된다. 나미비아의 지방 자치 단체는 (파트 1 또는 파트 2) 시 자치체, 읍 자치체 또는 마을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4.3. 인권
나미비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정부는 인권과 자유를 유지하고 보호한다. 그러나 정부 부패, 정책 관성, 교도소 과밀화 등 중요한 문제들이 존재한다. 또한 난민들은 자유로운 이동이 허용되지 않는다.
과거 동성애 행위는 나미비아에서 불법이었으나, 해당 법은 집행되지 않았다. LGBT에 대한 차별과 편협은 특히 농촌 지역에서 만연하다. 도시 지역은 일반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지지적이며, 소수의 LGBT 전용 클럽과 행사가 존재한다. 나미비아의 옴부즈맨 존 월터스와 영부인 모니카 게인고스와 같은 일부 정부 관리들과 저명인사들은 계간과 동성애의 비범죄화를 요구하며 LGBT 권리를 지지해왔다. 2023년 대법원은 나미비아 외부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동성 결혼을 정부가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2024년 빈트후크 고등법원은 남성 간 동성애 행위 금지를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2018년 보고에 따르면, 15~49세 여성의 32%가 배우자/파트너로부터 여성 폭력 및 가정 학대를 경험했으며, 남성의 29.5%는 아내/파트너에 대한 신체적 학대가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주로 농촌 지역의 경우이다. 나미비아 헌법은 여성의 권리, 자유 및 평등한 대우를 보장하며, 집권당인 SWAPO는 정부 내 양성 평등과 여성의 동등한 대표성을 보장하는 "얼룩말 시스템(zebra system)"을 채택했다.
5. 군사

2023년 글로벌 파이어파워 지수(GFP)에 따르면, 나미비아의 군사력은 세계 145개국 중 123위로 약한 편에 속한다. 아프리카 34개국 중에서도 28위로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미비아 국방부 예산은 58억 8,500만 나미비아 달러(전 회계연도 대비 1.2% 감소)에 달했다. 약 60억 나미비아 달러(2021년 기준 4.11 억 USD)로 국방부는 정부 부처 중 네 번째로 많은 예산을 배정받는다.
나미비아는 지역 내에 적대국이 없지만, 국경 및 건설 계획과 관련하여 다양한 분쟁에 연루된 바 있다.
나미비아 헌법은 군대의 역할을 "영토와 국익 수호"로 규정한다. 나미비아는 23년간의 부시 전쟁에서 적대 관계였던 나미비아 인민해방군(PLAN)과 남서아프리카 영토군(SWATF) 출신들로 구성된 나미비아 국방군(NDF)을 창설했다. 영국 정부가 이들 군대의 통합 계획을 수립하고 NDF 훈련을 시작했으며, NDF는 소규모 본부와 5개 대대로 구성된다.
유엔 나미비아 과도 지원단(UNTAG)의 케냐 보병 대대는 독립 후 3개월간 나미비아에 남아 NDF 훈련을 돕고 북부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나미비아 국방부에 따르면, 남녀 모두 징집 인원은 7,500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나미비아는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나미비아 국방군의 총사령관은 공군 중장 마틴 캄불루 피네하스(Martin Kambulu Pinehas, 2020년 4월 1일 부임)이다.
2017년, 나미비아는 유엔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6. 대외 관계

나미비아는 대체로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하며, 쿠바를 포함하여 독립 투쟁을 지원했던 국가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작은 군대와 취약한 경제를 가진 나미비아 정부의 주요 외교 정책 관심사는 남부 아프리카 지역 내 유대 강화이다.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 회원국인 나미비아는 더 큰 지역 통합을 강력히 주장한다. 1990년 4월 23일 유엔의 160번째 회원국이 되었으며, 독립과 동시에 영연방의 50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6.1.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관계
나미비아는 역사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과거 남아공의 위임 통치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영향으로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으나, 1990년 나미비아 독립 이후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켜왔다. 경제적으로 나미비아는 남아공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며, 남부아프리카관세동맹(SACU)의 회원국으로서 긴밀한 무역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미비아 달러는 남아공 랜드와 1:1로 연동되어 있다. 정치적으로도 양국은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 1994년 남아공은 월비스베이와 펭귄 제도를 나미비아에 반환하며 과거사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6.2. 독일과의 관계
독일은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나미비아를 식민 통치했으며, 이 기간 동안 헤레로·나마 집단학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거사는 양국 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립 이후 나미비아는 독일에 과거사 문제에 대한 책임 인정과 배상을 요구해왔다. 2021년 독일 정부는 집단학살을 공식 인정하고 11.00 억 EUR 규모의 개발 원조를 약속했으나, 배상의 성격과 규모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현재 독일은 나미비아의 주요 개발 협력 파트너 중 하나이며, 경제,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6.3.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과 나미비아는 1990년 3월 22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양국은 주로 경제 및 개발 협력 분야에서 관계를 발전시켜왔다. 한국은 나미비아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를 제공하고 있으며, 교육, 보건,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교역 규모는 크지 않으나, 수산물, 광물 자원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 교류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K-pop 등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도 나타나고 있다. 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이 나미비아를 겸임하고 있다.
6.4. 일본과의 관계
일본과 나미비아는 1990년 3월 21일 나미비아 독립과 동시에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일본은 나미비아의 국가 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경제 협력 및 기술 지원을 제공해왔다. 주요 협력 분야는 수산업, 인프라 개발, 교육 등이다. 일본은 나미비아산 수산물(특히 참치)의 주요 수입국 중 하나이다. 문화 교류는 많지 않으나, 정부 차원의 교류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나미비아에는 일본 대사관이 없으며, 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일본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6.5. 기타 국가들과의 관계
나미비아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앙골라, 보츠와나, 잠비아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국가와는 국경 문제, 수자원 공유, 경제 협력 등 다양한 현안을 다루고 있다. 특히 앙골라와는 과거 독립 투쟁 과정에서 SWAPO의 주요 거점이었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외에도 나미비아는 미국, 유럽 연합 회원국, 중국 등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국제 사회의 다양한 파트너 국가들과 경제, 개발, 안보 등 여러 분야에서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7. 경제
나미비아 경제는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2023년 3분기 기준, 가장 큰 경제 부문은 광업(GDP의 18.0%), 공공 행정(12.9%), 제조업(10.1%), 교육(9.2%) 순이었다. 나미비아는 온라인 뱅킹 및 휴대폰 뱅킹과 같은 현대적인 인프라를 갖춘 고도로 발달된 은행 및 금융 서비스 부문을 보유하고 있다. 나미비아 은행(BoN)은 중앙은행으로서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는 중앙은행이다. 나미비아에는 Bank Windhoek, First National Bank, Nedbank, Standard Bank, Small and Medium Enterprises Bank 등 5개의 BoN 공인 상업은행이 있다.
나미비아 경제는 공식 경제와 비공식 경제 간의 격차가 특징이며, 이는 부분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공간 계획의 유산에 의해 악화되었다. 2018년 실업률은 33.4%였으며, 노동력은 1,090,153명이었다. 2023년 기준 청년 실업률은 38.4%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 중 하나이다. 그러나 나미비아는 SADC 국가에 비해 숙련 노동자 비율이 높고 숙련 노동자의 실업률은 상대적으로 낮다. 특히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는 고용주가 더 많은 인턴을 등록하도록 장려하기 위한 인턴십 세금 인센티브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추가 법인세 공제를 제공하는 것을 승인했다. 정부의 총 재정적 영향은 N$1억 2,600만으로 추산된다.
빈곤과 불평등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이다. 인구의 40.9%가 다차원적 빈곤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추가로 19.2%가 다차원적 빈곤에 취약한 것으로 분류된다. 2015년 지니 계수는 59.1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소득 불균형 국가 중 하나이다.
2004년에는 임신 및 HIV/AIDS 상태로 인한 고용 차별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법이 통과되었다. 2010년 초 정부 입찰위원회는 "앞으로 모든 비숙련 및 반숙련 노동력의 100%는 예외 없이 나미비아 내에서 조달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2013년, 블룸버그는 나미비아를 아프리카 최고의 신흥 시장 경제이자 세계 13위로 선정했다.
나미비아의 생활비는 대부분의 상품(곡물 포함)을 수입해야 하므로 약간 높은 편이다. 수도인 빈트후크는 외국인이 살기에 세계에서 150번째로 물가가 비싼 곳이다.
나미비아의 세금에는 개인 소득세가 포함되며, 이는 개인의 총 과세 소득에 적용된다. 모든 개인은 일련의 소득 구간에 걸쳐 누진 한계 세율로 과세된다. 나미비아의 세금은 월 소득 N$58,754 이상일 경우 남아프리카 공화국 세금보다 낮으며, 나미비아의 실효 세율은 일반적으로 최대 30.8%에서 안정되는 반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37.4%에서 안정된다. 2024년 정부는 2024/25 회계연도 예산 성명에서 개인 소득세를 인하하여 최소 과세 소득을 N$50,000에서 N$100,000으로 인상하고 고소득 구간의 과세 소득도 줄일 것이라고 발표했다. 부가가치세(VAT)는 빵과 같은 생필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품과 서비스에 적용된다.
국토의 많은 부분이 외딴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나미비아는 항구, 공항, 고속도로, 잘 관리된 도로, 기반 시설 및 철도(협궤)를 갖추고 있다. 내륙 이웃 국가들과의 항구 및 무역을 위한 중요한 지역 교통 허브이다.
7.1. 주요 산업
나미비아 경제는 광업, 농업 및 목축업, 관광업 등 다양한 산업 분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산업은 국가 경제와 고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7.1.1. 광업 및 에너지
나미비아 국내 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하는 광업은 경제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하는 단일 산업이다. 나미비아는 아프리카에서 네 번째로 큰 비연료 광물 수출국이며,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우라늄 생산국이었다. 우라늄 채굴에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졌으며, 나미비아는 2015년까지 세계 최대 우라늄 수출국이 될 계획이었으나, 2019년 기준 연간 750톤의 우라늄을 생산하여 경쟁이 치열한 세계 시장에서는 평균 이하의 수출국에 머물고 있다. 풍부한 충적 다이아몬드 매장량 덕분에 나미비아는 보석 품질 다이아몬드의 주요 공급원이다. 나미비아는 주로 보석 다이아몬드와 우라늄 매장지로 알려져 있지만, 납, 텅스텐, 금, 주석, 형석, 망간, 대리석, 구리, 아연 등 여러 다른 광물도 산업적으로 추출된다. 2015년 금 생산량은 6톤이다. 대서양에는 향후 추출될 예정인 해상 가스 매장지가 있다.
"다이아몬드 조사(The Diamond Investigation)"라는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에 관한 책에 따르면, 1978년부터 최대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는 나미비아 다이아몬드 대부분을 구매했으며, "결국 어떤 정부가 집권하든 생존을 위해 이 수입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계속 구매할 것이라고 한다. 세계 다이아몬드 공급량의 상당 부분이 소위 아프리카 분쟁 다이아몬드에서 나오지만, 나미비아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보유한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을 괴롭혔던 분쟁, 착취, 살인과 같은 문제로부터 대체로 자유로운 다이아몬드 채굴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정치적 역학, 경제 제도, 불만, 정치 지리, 주변 환경의 영향 덕분이며, 정부와 드비어스 간의 공동 협정의 결과로 과세 기반을 마련하여 국가 기관을 강화한 덕분이다.
2022년에 업데이트된 추정에 따르면, 해상 오렌지 분지의 두 탐사 유정에는 각각 20억 배럴과 30억 배럴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수 있다. 예상되는 수입은 나미비아 국내 경제를 변화시키고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를 촉진할 수 있다.
국내 공급 전압은 220V AC이다. 전기는 주로 화력 및 수력 발전소에서 생산된다. 비전통적인 발전 방법도 일부 역할을 한다. 풍부한 우라늄 매장량에 힘입어 2010년 나미비아 정부는 2018년까지 첫 번째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이었으며, 우라늄 농축도 현지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7.1.2. 농업 및 목축업

나미비아 인구의 약 절반이 생계를 위해 농업(주로 자급 농업)에 의존하지만, 여전히 일부 식량을 수입해야 한다. 1인당 GDP는 아프리카 최빈국의 1인당 GDP의 5배이지만, 나미비아 국민 대다수는 농촌 지역에 거주하며 자급자족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나미비아는 도시 경제와 현금 없는 농촌 경제가 공존하는 부분적인 이유로 세계에서 소득 불평등률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따라서 불평등 수치는 생계를 위해 공식 경제에 실제로 의존하지 않는 사람들을 고려한다. 경작지는 나미비아의 1% 미만(약 0.97%)을 차지하지만, 인구의 거의 절반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요 농작물로는 옥수수, 수수, 진주조 등이 있으며, 가축으로는 소, 양, 염소 등이 주로 사육된다. 특히 소고기는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이다.
약 4,000명의 상업 농부가 나미비아 경작지의 거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 2004년 영국은 나미비아가 토지 없는 흑인 나미비아인을 재정착시키기 위해 백인 농부로부터 토지를 수용하기 시작할 계획임에 따라 나미비아의 토지 개혁 과정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약 18만 달러를 제공했다. 독일은 20세기 초의 집단학살에 대한 배상으로 2021년에 30년간 11.00 억 EUR를 제공했지만, 이 돈은 토지 개혁이 아닌 기반 시설, 의료 및 훈련 프로그램에 사용될 예정이다.
나미비아에서 경제 발전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 중 하나는 지역사회 기반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성장이다.
7.1.3. 관광업

관광업은 나미비아 GDP의 주요 기여 부문(14.5%)이며, 직간접적으로 수만 개의 일자리(전체 고용의 18.2%)를 창출하고 연간 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한다. 나미비아는 아프리카의 주요 관광지이며, 광범위한 야생동물을 특징으로 하는 생태관광으로 유명하다.
생태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한 많은 숙소와 보호구역이 있다. 스포츠 및 트로피 사냥 또한 나미비아 경제에서 크고 성장하는 요소로, 2000년 전체 관광의 14% 또는 미화 1,960만 달러를 차지했으며, 나미비아는 국제 스포츠 사냥꾼들이 찾는 수많은 종을 자랑한다.
또한, 샌드보딩, 스카이다이빙, 사륜구동 자동차 여행과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가 인기를 얻고 있으며, 많은 도시에는 투어를 제공하는 회사가 있다.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으로는 수도인 빈트후크, 카프리비 스트립, 피시리버 캐니언, 소수스블레이, 스켈레톤 코스트 공원, 세스리엠, 에토샤 염전 및 해안 도시인 스바코프문트, 월비스베이, 뤼데리츠 등이 있다.
빈트후크는 중앙 위치와 호세아 쿠타코 국제공항과의 근접성으로 인해 나미비아 관광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미비아 관광청을 위해 밀레니엄 챌린지 코퍼레이션이 제작한 나미비아 관광 출구 조사에 따르면, 2012~13년 나미비아를 방문한 모든 관광객의 56%가 빈트후크를 방문했다. 나미비아 야생동물 리조트 및 나미비아 관광청과 같은 나미비아의 주요 관광 관련 공기업 및 관리 기관, 그리고 나미비아 호텔 협회와 같은 나미비아의 관광 관련 무역 협회 본부가 빈트후크에 있다. 빈트후크에는 빈트후크 컨트리 클럽 리조트와 같은 주목할 만한 호텔과 힐튼 호텔 앤 리조트와 같은 일부 국제 호텔 체인도 있다.
나미비아의 주요 관광 관련 관리 기관인 나미비아 관광청(NTB)은 의회법인 2000년 나미비아 관광청법(2000년 법률 제21호)에 의해 설립되었다. 주요 목표는 관광 산업을 규제하고 나미비아를 관광지로 마케팅하는 것이다. 나미비아 관광 협회 연맹(나미비아 모든 관광 협회의 총괄 기구), 나미비아 호텔 협회, 나미비아 여행사 협회, 나미비아 렌터카 협회, 나미비아 투어 및 사파리 협회와 같은 여러 무역 협회도 나미비아 관광 부문을 대표한다.
7.2. 사회 기반 시설
나미비아는 광대한 국토와 낮은 인구 밀도에도 불구하고 교통, 통신, 에너지 및 물 공급 등 주요 사회 기반 시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 간, 그리고 소득 계층 간 격차는 여전히 존재한다.
7.2.1. 교통 및 통신

나미비아는 상대적으로 잘 발달된 교통망을 갖추고 있다. 총 도로 길이는 약 4.89 만 km에 달하며, 이 중 약 7820 km가 포장도로이다 (2018년 기준). 주요 도시와 지역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는 잘 관리되고 있으나, 농촌 지역의 비포장도로는 접근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트랜스-칼라하리 고속도로와 트랜스-카프리비 고속도로는 지역 내 무역과 관광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철도망은 총 2628 km (2017년 기준, 협궤)로, 주로 광물 자원 수송과 여객 운송에 이용된다. 주요 노선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연결되어 있으며, 국내 주요 도시들을 잇는다.
주요 항구는 월비스베이항으로,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중요한 환적항 역할을 한다. 뤼데리츠항도 소규모로 운영된다. 국제공항으로는 수도 빈트후크 인근의 호세아 쿠타코 국제공항이 있으며, 국내선 및 지역 국제선을 위한 에로스 공항도 빈트후크에 있다.
통신 부문에서는 유선 전화 보급률은 낮으나 (2022년 기준 100명당 약 4.5회선), 이동통신 보급률은 100%를 넘어섰다 (2022년 기준 100명당 약 109회선). 인터넷 보급률도 꾸준히 증가하여 2022년 기준 약 51%에 달한다. 주요 통신 사업자로는 텔레콤 나미비아(유선), MTC(이동통신), 파라투스 텔레콤 등이 있다.
7.2.2. 물 공급 및 위생
나미비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건조한 국가 중 하나로, 물 공급은 중요한 과제이다. 주요 수원은 지하수, 댐, 그리고 국경을 이루는 강(오렌지강, 쿠네네강, 오카방고강 등)이다. 도시 지역의 물 공급 시스템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으나, 농촌 지역은 여전히 물 부족과 수질 문제에 직면해 있다. 나미비아 수자원공사(NamWater)가 국가 전체의 대규모 물 공급을 담당한다.
위생 시설 접근성은 도시와 농촌 간 격차가 크다. 2020년 기준, 개선된 위생 시설 접근율은 전체 인구의 약 64% (도시 84%, 농촌 40%)이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개방 배변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며, 이는 공중 보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정부와 국제 기구들은 물 공급 및 위생 개선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7.3. 경제 문제
나미비아 경제는 독립 이후 꾸준히 성장해왔으나, 여러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 높은 실업률: 특히 청년 실업률이 매우 높아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2023년 기준 청년 실업률은 38.4%에 달했다. 숙련 노동자에 대한 수요는 있으나, 전반적인 일자리 부족이 심각하다.
- 소득 불균형: 나미비아는 세계에서 지니 계수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로, 극심한 소득 불균형을 나타낸다. 2015년 지니 계수는 59.1이었다. 이는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유산과 함께, 소수의 부유층에게 경제적 부가 집중된 결과이다.
- 빈곤 문제: 인구의 상당수가 여전히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2023년 기준, 인구의 40.9%가 다차원적 빈곤 상태에 있으며, 19.2%는 빈곤 취약 계층으로 분류된다. 특히 농촌 지역과 비공식 부문 종사자들의 빈곤이 심각하다.
- 제한적인 산업 다각화: 경제가 광업(특히 다이아몬드, 우라늄)과 같은 1차 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국제 원자재 가격 변동에 취약하다. 제조업 기반이 약하고, 농업 생산성도 낮은 편이다.
- 토지 문제: 식민 시대부터 이어진 토지 소유 불균형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소수의 상업 농가가 대부분의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어, 토지 개혁에 대한 요구가 지속되고 있다.
나미비아 정부는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 개발 계획(National Development Plans)을 수립하고, 빈곤 퇴치, 일자리 창출, 교육 및 보건 시스템 개선, 산업 다각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구조적인 제약과 재정적 한계로 인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8. 사회
나미비아 사회는 다양한 민족 구성, 언어, 종교적 배경을 가진 다문화 사회이다. 인구 통계, 민족 구성, 언어 사용 현황, 종교 분포, 교육 및 보건 시스템은 나미비아 사회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8.1. 인구

나미비아는 몽골 다음으로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낮은 주권국이다. 2023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총인구는 3,022,401명이며, 인구 밀도는 km²당 약 3.7명이다. 2017년 기준으로는 km²당 평균 3.08명이었다. 2015년 합계출산율은 여성 1명당 3.47명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평균인 4.7명보다 낮았다.
나미비아는 10년마다 인구 조사를 실시한다. 독립 후 첫 번째 인구 및 주택 조사는 1991년에 실시되었으며, 이후 2001년, 2011년,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과 재정적 제약으로 2년 지연된 2023년에 추가 조사가 이루어졌다. 자료 수집 방법은 인구 조사 기준일 밤에 나미비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그들이 있는 곳에서 집계하는 방식(사실상 조사 방식, de facto method)이다. 열거를 위해 국가는 4,042개의 열거 지역으로 구분되며, 이 지역들은 선거 목적의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를 얻기 위해 선거구 경계와 중복되지 않는다.
2011년 인구 및 주택 조사에서는 2,113,077명의 주민이 집계되었다. 2001년에서 2011년 사이 연간 인구 증가율은 1.4%로, 이전 10년 기간의 2.6%에서 감소했다.
북부의 에토샤 염호 부근 쿠벨라이-에토샤 분지에는 나미비아 인구의 약 40%가 거주하며, 특히 오샤나주의 인구 밀도는 수도 빈트후크가 있는 코마스주보다 높다.
2017년 기준 평균 수명은 64세로 추정되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 중 하나이다.
8.2. 민족 구성

나미비아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의 대다수는 반투족과 코이산족이다.
2023년 인구 조사(나미비아 통계청)에 따르면 주요 민족 집단의 구성 비율은 다음과 같다:
- 오밤보족 (Ovambo): 50.3% - 나미비아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으로, 주로 북부에 거주한다.
- 카방고족 (Kavango): 9.7% - 주로 북동부 오카방고강 유역에 거주한다.
- 오치헤레로어 사용 민족 (Otjiherero-speaking): 9.4% - 헤레로족과 힘바족 등이 포함된다.
- 다마라족/나마족 (Damara/Nama): 9.3% - 코에코에어를 사용하는 주요 코이산계 민족이다.
- 잠베지족 (Zambezians): 4.9% - 주로 잠베지주(구 카프리비 스트립)에 거주하는 여러 민족을 포함한다.
- 산족 (San): 1.9% - 남부 아프리카의 가장 오래된 원주민 중 하나이다.
- 바스터인 (Baster): 1.5% - 주로 레호보트 지역에 거주하는 혼혈 후손이다.
- 컬러드 (Coloured): 2.1% - 다양한 혼혈 배경을 가진 집단이다.
- 백인 (White Namibians): 1.8% - 주로 아프리카너, 독일계, 영국계, 포르투갈계 후손이다. 나미비아 백인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다음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유럽계 인구 비율 및 실질 인구 수에서 두 번째로 큰 집단을 형성한다.
- 츠와나족 (Tswana): 0.3%
- 기타 아프리카계: 0.5%
- 기타: 0.1% (주로 중국계 포함)
과거 인구 조사에서는 흑인이 약 87.5%, 백인이 6%, 혼혈(컬러드 및 바스터)이 6.5%로 집계되기도 했으나, 최신 자료는 더 세분화된 분류를 제공한다. 백인 인구는 독립 후 이민과 낮은 출생률로 인해 비율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사회 구성원이다.
8.3. 언어
언어 | 비율 (%) |
---|---|
오시밤보어 | 49.7 |
코에코에어 | 11.0 |
카방고 제어 | 10.4 |
아프리칸스어 | 9.4 |
헤레로 제어 | 9.2 |
로지어 | 4.9 |
영어 | 2.3 |
기타 | 1.0 |
산 제어 | 0.7 |
독일어 | 0.6 |
기타 아프리카어 | 0.5 |
츠와나어 | 0.3 |
기타 유럽어 | 0.1 |
나미비아의 유일한 공식어는 영어이지만, 인구의 2.3%만이 가정에서 영어를 사용한다 (2016년 기준). 영어는 주로 공무, 교육, 방송 시스템, 특히 국영 방송사인 NBC에서 사용된다. 일부 다른 언어들은 초등 교육 매체로 허용되어 준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2016년 조사에 따르면, 가장 널리 사용되는 가정 언어는 오시밤보어 (가구의 49.7%)이다. 그 뒤를 이어 코에코에어 (11.0%), 카방고 제어 (10.4%), 아프리칸스어 (9.4%), 헤레로 제어 (9.2%), 로지어 (실로지, 4.9%) 순이다. 아프리칸스어는 국가의 링구아 프랑카로 여겨지며 상당한 사용률을 보인다. 산 제어는 0.7%, 독일어는 0.6%, 기타 아프리카어는 0.5%, 츠와나어는 0.3%, 기타 유럽어는 0.1%를 차지한다.
1990년 독립 이전까지는 영어, 독일어, 아프리칸스어가 공식어였다. SWAPO는 독립 전부터 국가가 공식적으로 단일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며,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12개 주요 언어에 공식 지위를 부여)의 접근 방식과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단일 언어 정책 추진은 다른 탈식민지 아프리카 사회와 마찬가지로 높은 학교 중퇴율과 어떤 언어로든 학업 능력이 낮은 개인들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
대부분의 백인 인구는 영어, 아프리칸스어 또는 독일어를 사용한다. 독일 식민 시대가 끝난 지 한 세기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어는 상업 언어로서 계속 역할을 하고 있다. 백인 사회의 60%는 아프리칸스어를, 32%는 독일어를, 7%는 영어를, 4~5%는 포르투갈어를 가정 언어로 사용한다. 포르투갈어 사용자는 2011년 기준으로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는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앙골라와의 지리적 근접성 때문이다. 포르투갈어는 학교 교육에도 도입되고 있다.
8.4. 종교

나미비아 인구의 80~90%가 기독교를 믿으며, 이 중 최소 75%가 개신교이고, 그 중에서도 최소 50%(2023년 기준 전체 인구의 43.7%)가 루터교 신자이다. 루터교는 나미비아에서 가장 큰 종교 집단으로, 이는 식민 시대 독일과 핀란드 선교사들의 활동 유산이다. 2023년 기준, 가톨릭은 22.8%, 성공회는 17.0%, 기타 기독교는 4.4%를 차지한다. 인구의 약 10.2%는 전통 신앙을 따르며, 1.6%는 무종교이다.
19세기 후반의 선교 활동으로 많은 나미비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루터교인이지만, 로마 가톨릭, 감리교, 성공회, 아프리카 감리교 감독교회,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들도 있다.
나미비아의 이슬람교 신자는 약 9,000명으로, 상당수가 나마족이다. 나미비아에는 약 100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유대교 공동체도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종교 단체들도 활동하고 있다.
8.5. 교육
나미비아는 초등 및 중등 교육 과정 모두 무상 교육을 제공한다. 1~7학년은 초등 과정, 8~12학년은 중등 과정이다. 1998년에는 초등학교에 400,325명, 중등학교에 115,237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 1999년 교사 대 학생 비율은 32:1로 추산되었으며, GDP의 약 8%가 교육에 지출되었다. 교육 과정 개발, 교육 연구 및 교사 전문성 개발은 오카한자에 있는 국립교육개발원(NIED)에서 중앙 집중적으로 조직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중 나미비아는 식자율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2018년 CIA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15세 이상 인구의 91.5%가 읽고 쓸 수 있다.
나미비아의 대부분 학교는 국영이지만, 일부 사립학교도 국가 교육 시스템의 일부를 구성한다. 교원 양성 대학 4곳, 농업 대학 3곳, 경찰 훈련 대학 1곳, 그리고 나미비아 대학교(UNAM), 국제경영대학교(IUM), 나미비아 과학기술대학교(NUST) 등 3개의 대학교가 있다. 나미비아는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102위를 차지했다.
2018년 나미비아 노동력 조사에 따르면, 노동 연령 인구 중 99,536명(노동 연령 인구의 6.6%)이 모든 수준의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이 중 21,922명(노동 연령 인구의 1.5%)은 대학원 교육을 받았다. 나미비아의 고용률은 일반적으로 교육 수준에 따라 증가한다. 고등학교 교육은 일반적으로 무학력자나 초등 교육 또는 중등 교육이 최고 학력인 사람들보다 높은 고용률을 보장한다. 대학교 졸업장, 수료증 또는 학위를 가진 나미비아인은 76.4%로 훨씬 높은 고용률을 보이며, 대학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2018년 고용률 83.8%로 가장 고용될 가능성이 높다.
8.6. 보건
나미비아의 출생 시 기대수명은 2017년 기준 64세로 추정되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 중 하나이다.
나미비아는 2012년 국가 보건 확장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응급 처치, 질병 예방을 위한 건강 증진, 영양 평가 및 상담, 물 위생 및 위생 관행, HIV 검사 및 지역사회 기반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를 포함한 지역사회 보건 활동에 대해 6개월간 훈련받은 보건 확장 요원 1,800명(2015년)을 배치했으며, 총 상한선은 4,800명이다.
나미비아는 비전염성 질환 부담에 직면해 있다. 2013년 인구 및 건강 조사(DHS)는 고혈압, 당뇨병, 비만에 대한 결과를 요약했다:
- 35~64세 해당 응답자 중 여성의 44%, 남성의 45%가 고혈압이거나 현재 혈압 강하제를 복용 중이다.
- 여성의 49%, 남성의 61%는 자신이 고혈압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 고혈압 환자 중 여성의 43%, 남성의 34%가 약물 치료를 받고 있다.
- 고혈압 환자 중 약물 치료를 받고 혈압이 조절되는 비율은 여성 29%, 남성 20%에 불과하다.
- 여성의 6%, 남성의 7%가 당뇨병 환자이다. 추가로 여성의 7%, 남성의 6%가 당뇨병 전단계이다.
- 당뇨병 환자 중 여성의 67%, 남성의 74%가 혈당 강하제를 복용하고 있다.
- 정상보다 높은 체질량 지수(25.0 이상)를 가진 여성과 남성은 고혈압 및 공복 혈당 상승 가능성이 더 높다.
HIV/AIDS 유행병은 나미비아 보건사회복지부가 HIV 치료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미비아에서 여전히 공중 보건 문제로 남아있다. 2001년에는 약 21만 명이 HIV/AIDS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2003년 사망자 수는 16,000명으로 추산되었다. 2011년 UNAIDS 보고서에 따르면 나미비아의 유행병은 "안정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HIV/AIDS 유행병으로 인해 노동 연령 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고아 수가 증가했다. 이들 고아에게 교육, 식량, 주거 및 의복을 제공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2013년 DHS는 HIV 유행병과 관련된 중요한 특징을 관찰했다:
- 15~49세 남성의 26%, 50~64세 남성의 32%가 포경수술을 받았다. 15~49세 남성의 HIV 유병률은 포경수술을 받은 남성(8.0%)이 받지 않은 남성(11.9%)보다 낮다.
- 15~49세 응답자의 HIV 유병률은 여성 16.9%, 남성 10.9%이다. 50~64세 여성과 남성의 HIV 유병률은 비슷하다(각각 16.7%와 16.0%).
- HIV 유병률은 여성과 남성 모두 35~39세 연령 그룹에서 가장 높다(각각 30.9%와 22.6%). 15~24세 응답자에서 가장 낮다.
- 15~49세 응답자 중 HIV 유병률은 잠베지주의 여성과 남성에서 가장 높고(각각 30.9%와 15.9%), 오마헤케주의 여성(6.9%)과 오항궤나주의 남성(6.6%)에서 가장 낮다.
- 2013년 NDHS에서 HIV 검사를 받은 1,007쌍의 동거 커플 중 76.4%는 두 파트너 모두 HIV 음성이었고, 10.1%는 두 파트너 모두 HIV 양성이었으며, 13.5%는 불일치했다(즉, 한 파트너는 HIV에 감염되었고 다른 파트너는 그렇지 않았다).
2015년 기준, UNAIDS는 15~49세 인구의 HIV 유병률을 13.3%, HIV 감염자 수를 약 21만 명으로 추정했다.
말라리아 문제는 AIDS 유행병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에 따르면 나미비아에서 HIV에 동시 감염된 경우 말라리아에 걸릴 위험이 14.5% 더 높으며, 말라리아로 인한 사망 위험도 약 50% 증가한다. 2002년 기준, 나미비아에는 의사가 598명뿐이었다.
9. 문화
나미비아 문화는 역사적 유대감과 가족 국적으로 인해 남아프리카 문화와 유사하다. 나미비아인들은 다른 나라에 영구 정착하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조국의 안전을 선호하고 강한 국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잘 공급되는 소매 부문을 즐긴다. 나미비아인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사교적이며 1인당 알코올 소비율이 지속적으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며, 1인당 맥주 소비량에서 아프리카 1위를 차지했다.
9.1. 스포츠

나미비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나미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1998년, 2008년, 2019년, 202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에 진출했지만, 아직 FIFA 월드컵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주목할 만한 선수로는 더비 카운티의 라이트백 라이언 냠베, 마멜로디 선다운스의 공격수 피터 샬룰릴레, 그리고 은퇴한 축구 선수 콜린 벤자민 등이 있다.
가장 성공적인 국가대표팀은 나미비아 럭비팀으로, 지난 7번의 럭비 월드컵에 참가했다. 나미비아는 1999년, 2003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그리고 가장 최근의 2023년 럭비 월드컵 참가국이었다. 크리켓 또한 나미비아에서 인기가 있으며, 국가대표팀은 2003년 크리켓 월드컵, 2021년 ICC T20 월드컵, 2022년 ICC 남자 T20 월드컵에 진출했다. 2017년 12월, 나미비아 크리켓팀은 남아프리카 크리켓 협회(CSA) 지방 원데이 챌린지 결승에 처음으로 진출했다. 2018년 2월 나미비아는 ICC 월드 크리켓 리그 디비전 2를 개최하여 나미비아, 케냐, UAE, 네팔, 캐나다, 오만이 짐바브웨에서 열리는 ICC 크리켓 월드컵 예선 최종 두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나미비아는 또한 ICC T20 월드컵 2021 예선을 통과하여 슈퍼 12 클럽에 진입했다.
나미비아 출신의 가장 유명한 운동선수는 100m와 200m 단거리 선수인 프랭키 프레더릭스이다. 그는 올림픽 은메달 4개(1992, 1996)를 획득했으며, 여러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도 메달을 획득했다. 골프 선수 트레버 도즈는 1998년 그레이터 그린즈버러 오픈에서 우승했으며, 이는 그의 경력 15개 대회 중 하나이다. 그는 1998년 세계 랭킹 78위라는 개인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프로 사이클리스트이자 나미비아 도로 경주 챔피언인 댄 크레이븐은 2016년 하계 올림픽 도로 경주와 개인 타임 트라이얼 모두에서 나미비아를 대표했다. 복서 줄리어스 인동고는 라이트웰터급 통합 WBA, IBF, IBO 세계 챔피언이다. 나미비아 출신의 또 다른 유명 운동선수는 전 프로 럭비 선수 자크 버거이다. 버거는 유럽의 사라센스와 오리야크에서 뛰었으며, 국가대표팀에서도 41경기에 출전했다.
9.2. 대중 매체

이웃 국가들과 비교할 때, 나미비아는 상당한 수준의 언론 자유를 누리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나미비아는 국경 없는 기자회의 언론 자유 지수에서 통상 상위권을 차지했으며, 2010년에는 21위를 기록하여 캐나다와 동등한 수준이자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아프리카 미디어 바로미터도 유사하게 긍정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미비아에서도 여전히 국가 및 경제계 대표들이 언론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2009년 나미비아는 언론 자유 지수에서 36위로 하락했다. 2013년에는 19위, 2014년에는 22위, 2019년에는 23위를 기록하여 현재 언론 자유 측면에서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높은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나미비아 인구는 상당히 적지만, 다양한 미디어를 보유하고 있다. TV 방송국 2곳, 라디오 방송국 19곳(커뮤니티 방송국 제외), 일간 신문 5곳, 여러 주간지 및 특별 간행물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또한,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중심으로 상당한 양의 외국 미디어가 이용 가능하다. 온라인 미디어는 대부분 인쇄 간행물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나미비아에는 나미비아 통신사(NAMPA)라는 국영 통신사가 있다. 전체적으로 약 300명의 언론인이 나미비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나미비아 최초의 신문은 1898년에 창간된 독일어 신문 빈트후커 안차이거(Windhoeker Anzeiger)였다. 독일 통치 기간 동안 신문은 주로 백인 독일어 사용 소수의 생활 현실과 관점을 반영했으며, 흑인 다수는 무시되거나 위협으로 묘사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통치 기간 동안에도 백인 편향은 계속되었으며, 남아프리카 정부가 남서아프리카 미디어 시스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독립 신문은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비판적인 언론인들은 종종 위협을 받았다.
현재 발행되는 일간 신문으로는 민간 발행물인 더 나미비안 (영어 및 기타 언어), 디 레푸블리케인 (아프리칸스어), 알게마이네 차이퉁 (독일어), 나미비안 선 (영어)과 국영 신문인 뉴 에라 (주로 영어)가 있다. 가장 큰 신문인 더 나미비안은 신탁 소유이며, 언급된 다른 민간 신문들은 데모크라틱 미디어 홀딩스의 일부이다. 기타 주목할 만한 신문으로는 트러스트코 소유의 타블로이드 신문 인포르만테(Informanté), 주간지 빈트후크 옵서버, 주간지 나미비아 이코노미스트, 그리고 지역 신문 나미브 타임스(Namib Times)가 있다. 시사 잡지로는 인사이트 나미비아(Insight Namibia), 비전2030 포커스 매거진(Vision2030 Focus magazine), 프라임 포커스(Prime FOCUS) 등이 있다. 시스터 나미비아(Sister Namibia) 잡지는 나미비아에서 가장 오래 운영되는 NGO 잡지이며, 나미비아 스포츠(Namibia Sport)는 유일한 전국 스포츠 잡지이다. 또한, 인쇄 시장은 정당 간행물, 학생 신문 및 홍보 간행물로 보완된다.
라디오는 1969년에, TV는 1981년에 도입되었다. 오늘날 방송 부문은 국영 나미비아 방송 공사(NBC)가 주도하고 있다. 공영 방송사는 TV 채널 1개와 영어 "내셔널 라디오" 채널 1개, 그리고 현지 언어로 된 9개의 언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국내 9개의 민영 라디오 방송국은 주로 영어 채널이며, 라디오 오물룽가(오시밤보어)와 코스모스 94.1(아프리칸스어)은 예외이다. 민영 원 아프리카 텔레비전은 2000년대부터 NBC와 경쟁해왔다.
나미비아의 미디어와 언론인들은 남부 아프리카 미디어 연구소(MISA) 나미비아 지부와 나미비아 편집인 포럼에 의해 대표된다. 국가 통제 미디어 평의회를 막기 위해 2009년에 독립 미디어 옴부즈맨이 임명되었다.
9.3. 예술
나미비아 국립미술관은 나미비아, 아프리카 및 유럽 예술품의 상설 전시와 현지 예술가들의 임시 전시를 개최한다. 2022년 나미비아는 "예술계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제59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렌(Renn)의 "고독한 돌사람들(Lone Stone Men)" 프로젝트를 특징으로 하는 "사막으로 가는 다리(A Bridge to the Desert)" 전시회로 경쟁했다.
9.4. 공휴일
나미비아의 주요 국경일 및 법정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공휴일이 일요일인 경우 다음 날이 대체 공휴일이 된다.
날짜 | 한국어 표기 | 영어 표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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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 새해 첫날 | New Year's Day | |
3월 21일 | 독립기념일 | Independence Day | |
이동 축일 | 성금요일 | Good Friday | 3월 - 4월 |
이동 축일 | 부활절 월요일 | Easter Monday | 3월 - 4월 |
5월 1일 | 노동절 | Workers' Day | |
5월 4일 | 카싱가의 날 | Cassinga Day | |
이동 축일 | 주님 승천 대축일 | Ascension Day | 부활절 40일 후 |
5월 25일 | 아프리카의 날 | Africa Day | |
8월 26일 | 영웅의 날 | Heroes' Day | |
12월 10일 | 인권의 날 / 나미비아 여성의 날 | Human Rights Day / Namibian Women's Day | |
12월 25일 | 크리스마스 | Christmas Day | |
12월 26일 | 가족의 날 | Family Day (formerly Boxing Day) |